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being aware of being aware
- 2023 루퍼트 스파이라 저
- 「내면소통」김주환 옮김
유튜브에서 김주환 교수님의 강연을 들은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 책도 관심이 갔지요. 작은 책이라 금방 읽히니 한번 읽어보심을 추천드립니다.
옮긴이의 말
우리가 갈망하는 온전한 평온함과 진정한 행복은 이미 우리 안에 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우리는 알아차림을 늘 알고 있으나 주의를 대상적(물질적)경험에 집중하느라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알아차림 자체가 '진짜 나'다.
스파이라에 따르면 명상 수행은 두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 단계는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벗어나서 순수의식으로서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시 일상적인 삶과 현실적인 경험으로 되돌아가서 순수의식과 실제 경험을 통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강조되고 있는 "직접적인 길direct path"이다.
명상의 목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편안해지고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내가 평온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본성이 곧 평온이고 행복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존재가 곧 진짜 "나"다. 진짜 나는 우리가 잊고 있을 뿐, 뒤에 배경에 늘 있다. 이것을 '배경자아'라 부른다. 저자가 책에서 영화 스크린에 비유하는 것이 바로 이 배경자아다.
나이 이름, 직업, 나이 성별, 성격, 몸, 생각, 감정, 기억, 특성, 행동, 습관, 인간관계 등도 모두 다 "내 것", "나에 관한 것"일 뿐 그 자체가 곧 "나"인 것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 것”과 “나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 내 것을 곧 나라고 착각한다.
일상적인 관념에서 "나"의 일부라고 믿었던 것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나는 나를 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나에 관한 모든 것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 그저 "내 것"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인식주체로서의 진짜 나의 자리는 늘 텅 비어 있다. 공空이다. 있지만 비어있다. 공간이 있어야 사물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서문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을 갈망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양한 대상과 물질, 활동, 마음 상태, 인간관계 영역에서 끊임없이 헤매며 탐색한다. 우리가 원하는 대상이나 경험을 얻을 때마다, 혹은 불편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때마다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낀다. 결국 사람들은 결핍, 탐색, 일시적인 충족이라는 무한한 순환에 중독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용히 절박한 삶을 살아간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알아차리기
알아차리기와 경험의 관계는 빗대어 말하자면 영화관에서의 스크린(막)과 영상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스크린은 명백하게 존재하지만, 영화속의 하나의 대상으로 보이는 일은 결코 없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스크린을 볼 때 아무 노력이 필요하지 않듯이, 알아차리기의 경험을 인식하는 데에는 아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영화의 내용 때문에 스크린 자체가 요동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스크린 자체는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갖 생각, 상상, 느낌, 감각, 지각의 형태로 끊임없이 움직이더라고 순수한 알아차림 그 자체의 실체는 그대로이다.
영화로 인해 스크린에 색채가 입혀지지만 스크린이 그 색채로 오염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은 경험에 의해 색채가 입혀지지만 경험 안에서 발생하는 무언가에 인해 변색되거나 훼손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순수한 알아차림 그 자체는 언제나 본연 그대로의 상태이다. 스크린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스크린은 절대로 파괴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 인물이 태어날 때 스크린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 인물이 늙어도 스크린은 늙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이 죽어도 스크린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알아차림은 스스로의 등장과 사라짐, 즉 시작과 끝, 탄생과 죽음을 결코 경험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순수한 알아차림임을 깨닫는 것은 궁극적인 치유가 된다. 만약 자기 자신이 순수한 알아차림이라는 것을, 단순한 알아차림의 경험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 사람은 늘 완벽한 건강을 누리게 된다.
우리 본질의 핵심
여러분이 앉아 있는 방에 무엇이 있는지 누군가 물어본다고 하자. 우리는 이런저런 사물들이 있다고 말하지 공간이 있다고 대답하는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알아차림은 모든 경험의 배경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과 같은 경험의 내용물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알아차림 그 자체를 잊어버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천)
다시 말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본질적인 모습을 잊어버린 것이다. 마치 우리가 꿈속에서 내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세상은 비현실이며 오직 브라만Brahman만이 현실이다. 브라만이 곧 세상이다." 라고 말했다.
뒤엉킨 알아차림
무한을 알 수 있는 것은 무한뿐이며, 유한을 알 수 있는 것은 유한뿐이다. 그러기에 마음의 형태(유한)를 통해서는 알아차림을(무한) 알 수 없다.
마치 꿈속의 인물이 꿈꾸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꿈속의 인물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꿈꾸는 사람의 마음의 제한된 일부가 반영된 결과이다.
스크린의 활동이 영화이고, 바닷물의 활동이 해류이듯이, 알아차림의 활동이 곧 마음이다. 이처럼 마음은 알아차림이 움직이는 것이며, 알아차림은 마음이 쉬는 것이다.
알아차림을 찾으려 애쓰는 마음은, 마치 바닷속에서 물을 찾으려 애쓰는 해류와도 같다. 그렇기에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운명에 빠지고 만다.
명상은 마음의 활동을 가라앉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본성이 순수한 앎, 곧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비활동, 비실천으로서의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활동은 가라앉는다.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 Am I aware?
이런 질문은마음을 대상이 없는objectless 방향으로 이끄는 신성한 물음이다.
마음은 이처럼 대상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비물질적인 방향으로) 이완되고 가라앉으며, 자신의 원천인 알아차림으로 되돌아간다.
(= 스크린 위의 이미지를 사라지게 하는 것.
= 색칠놀이의 색칠을 지우는 것
= 스크린임을 알아차리는것)
마음은 항상 어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마음이 스스로에게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때야 비로소 대상이 없는 방향으로의 여정, 즉 '길 없는 길' pathless path이 시작된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과정이 없는 이 여정을 "마음을 가슴속으로 가라앉히는 것 sinking the mind into the heart"이라 표현했다.
최고의 명상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당연히 아무 수행도 필요없다. 어떤 식으로든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면 마음을 하나의 대상으로 향하게 하거나, 주의의 초점을 제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명상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스스로를 쉬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는 어떤 행위가 필요하다. 생각, 느낌, 행동, 지각은 모두 마음의 행위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행위들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더이상 행위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일 뿐이다.
알아차림이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경험이다. 아쉬타바크라는 "현자에게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매우 성가신 일이다"라고 말했다.
수피 격언 "나는 신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나 자신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신을 발견했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입구 위에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져 있다. 같은 이유로 발리아니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를 아는 자는 신을 안다."
존 스미스라는 배우가
리어왕 역을 맡았다고 상상해보자.
*존 스미스 : 무한한 알아차림
*리어왕 : 개별적 자아, 유한한 마음, 애초에 없던 것, 환상.
어느 날 존 스미스가 맡은 배역에 너무나 깊이 몰입한 나머지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스스로가 리어왕이라고 믿는다고 상상해보자.
리어왕은 연극 속에서의 자신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존 스미스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리어왕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어왕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상, 물질, 활동, 마음 상태, 인간관계 속에서 위안을 얻고자 헤매게 될 것이다. 리어왕이 자신을 리어왕이라고 믿는 한, 이러한 헤맴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리어왕은 자신의 괴로움을 덜기위해 무언가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괴로워한다는 것은 곧 대상적 경험 안에서 끊임없이 행복을 찾으려 애쓴다는 뜻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리어왕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리어왕이 자신이 존 스미스라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자신의 본래 마음에게 스스로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정말 누구인가? 나의 경험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
불필요한 지식과 경험이 모두 다 버려지는 순간 '나는 존 스미스다'라는 앎이 드러난다. 리어왕이 존스미스를 인지하는게 아니라 존스미스가 존스미스임을 아는 것이다.
발리아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를 제외하고 그를 본 사람은 없으며, 그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에게 이르지 못하며, 그를 제외하고 누구도 그를 알지 못하노라. 그는 그를 통해서만 그를 알며 그에 의해서만 그를 본다. 오직 그만이 그를 본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나님을 보는 눈은 하나님이 나를 보는 눈과 같다."
알아차림의 바다
알아차림을 바다에 비유하자면, 생각은 수면에서 움직이는 파도이며, 느낌은 그 밑에서 흐르는 해류이다. 파도와 해류가 바다의 움직임이나 활동이라고 부를수 있듯이, 마음은 알아차림의 움직임이나 활동이다.
파도나 해류가 바닷속 깊은 곳을 향해 아래로 아래로 흐르게 되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넓어"지다가 결국 언젠가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파도나 해류는 자신의 형태를 읽게 되며, 그 결과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파도나 해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독자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파도가 다른 파도 안에서 평온함과 만족감을 얻을 수는 없다. 유한한 마음이 지속적인 평온함과 만족감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자기 존재의 심연으로 가라앉으면서 점차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뿐이다.
마무리
제가 얼마전에 꾼 꿈이 있어요.
꿈속에서 제가 슈퍼맨처럼 하늘을 막 날고 있더라고요. 날고 있는 제 모습을 제가 스크린 화면으로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꿈속에서 이건 꿈임을 인지하고 있었어요.
꿈임을 인지하면서, 훨훨 나는 내모습을 화면으로 볼 땐 재밌었어요. 그런데 순간, 꿈이라는 인지가 없어지고, 스크린도 없어지고, 그냥 제가 하늘을 막 나는데,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게 너~무 무서워서 깼던 기억이 있네요...장애물도 여기저기서 툭툭 솟구치고 말이죠.
이 책을 보고 갑자기 그 꿈이 떠올랐어요.
꿈속에서 이것이 꿈임을 인지하는 것.
인지하고 있으면 꿈속에서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어요.
만약 현실이 정말 매트릭스고 가상공간, 게임과 같은 공간이라면, 우린 더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겠지요.
게임을 두려움으로 하는 사람이 어디있나요..?
이 세상이 무無이고 공空인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러면 진정한 평온과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있겠죠.
저는 아래 붓다의 가르침이 제일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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