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수양_책

붓다의 가르침

키다리 가로등 2024. 2. 1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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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연대기

_2021 이학종 저


p43 '강자가 약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는 현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쳐보지만 약자의 몸부림은 강자에게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하는 세상, 그들도 더 강한 자들 앞에서는 두려움에 몸서리칠 가련한 처지인데도 그것을 잊은 채 탐욕에 들떠 있는 모습들! 왜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불편함을 그저 운명으로 여긴 채 견디고 있는 걸까? 저런 태도로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아, 나는 눈물과 고통을 초래하는 저런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p147 싯다르타의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후 상서로운 좋은 이름을 지어야 겠다는 양모의 말에 싯다르타는 자신을 향해 반문했다. '어쩌다가 우리의 삶이 이런 근거 없는 미신과 관습에 의해 지배를 당하게 된 것인가. 언제나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p155 '태어나면 죽는다. 죽은 후에는 또다시 다른 생으로 태어난다. 죽고 태어남의 고통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있다면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마치 거품처럼 쉽사리 사라진다. 생의 수수께끼를 풀 길은 없을까?' 라훌라의 탄생이 가져다준 이런 의문들은 또다시 그를 깊은 고민으로 이끌고 있었다. 

p191 출가 후 알라라 깔라마 선인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그는 싯다르타에게 지식호흡법(깊은 호흡을 자동적으로 하게 하는 강력한 기법)과 자신이 갈고닦아온 명상 지식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싯다르타, 내가 실행하는 명상의 목적은 우선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외부 세계의 감각대상들은 집착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외적인 사물에 의해 마음이 어지럽혀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쉽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작 단계에서 그대는 다섯 가지 족쇄를 풀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육체를 실재라고 보는 견해, 의혹, 의례와 관습에 대한 집착, 관능적 욕망, 마지막으로 악의이다. 이 다섯 가지의 족쇄를 끊어내야 한다. 그것들은 곧 그대를 묶고 있는 다섯 가지 사슬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 그대가 다섯 가지 사슬을 제거할 수 있다면 첫 단계 명상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태초에 생명은 그 형태를 알 수 없는 혼돈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생기고 나로부터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나 애착이 되었다. 애착에서 육체가 생기고, 탐욕과 질투 등 온갖 번뇌가 일어나고, 그 번뇌가 유전되어 생로병사와 슬픔과 괴로움을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을 통해 먼저 감각적인 자극과 마음의 산란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성향을 멀리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행복감이 일어나게 된다. 사색과 탐구를 계속하는 동안 세속적인 일들을 버림으로써 생기는 희열을 증진하도록 하라. 이것이 명상의 첫 단계이니라."

p193 "장하다. 싯다르타. 그대는 감각적 쾌락을 멀리함으로써 일어난 환희를 체험했다. 또한 그것에 대해서 사색하고 숙고했으며, 그것을 이전의 감각적 쾌감과 구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것이 보다 높은 차원의 느낌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사량과 분별을 계속한다면 그것을 가장 우월한 것으로 확신하게 되어 새로운 감각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그대는 이제 그러한 사량과 분별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 또 다른 유형의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

p198 명상의 그 경지에 오르는 동안 고통을 느끼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떤 행복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집중된 상태에서 물질계를 꿈같이 바라볼 수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명상하는 동안만 유지되는 것이었다. 정작 중요한 감각적인 세계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면, 이와 같은 경지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깨어나면 다시 감각의 세계에 말려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원하던 성취의 단계는 아니다. 수승한 지혜와 원만한 깨달음은 더더욱 아니다.

p210 '그동안 나는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의 지도 아래에서 명상 기법을 익혔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가 경험한 해방감이란 명상 중에 있을 때나 그 후 잠깐 동안에 그치고 말았다. 명상에서 깨어나면 곧바로 갖가지 욕망이 다시 나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저들이 닦는 극단적인 금욕수행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 좋은 음식으로 육체를 살찌우고 감각적 쾌락을 충족시키면서 어떻게 정신을 제어할 수 있겠느냐는 저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 어떻게 물에 젖은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방자한 감각에 길들여진 육체는 마치 젖은 나무토막과 같다. 나는 모든 욕망의 근원인 이 육체를 마른 나뭇가지처럼 만들고 말리라.'

p221 6년 동안의 치열한 고행을 통해 그가 얻은 소중한 교육은 경계해야 할 두 가지 문이었다. 하나는 세상의 즐거움을 따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삶, 다른 하나는 여생이나 행복을 얻기 위해 몸을 괴롭히는 고행에 빠지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어리석은 수행자가 찬양하는 삶이라는 것을 싯다르타는 철저하게 깨달았다

'물고기나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단식도, 삭발도, 결발도, 신에게 바치는 제물도, 불사(불사)를 얻기 위한다며 행해지는 고행 등등 그 어떤 수행이든 불건전한 마음 상태를 벗어나는 목적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런 것들로 인하여 사람이 깨끗해질 수는 없다. 주술도, 공양도, 제사도, 고행도 다 마찬가지다. 어떤 수행자는 신을 받드는 일에 의해서 더러움을 벗어나 깨끗하게 정화된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모두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저속한 무리들이 추종하는 고행에는 그 어떤 이익도 없다. 마치 배의 노가 숲 속에서 필요 없듯이, 맹목적인 고행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p224 '잠부나무 아래에서 경험했던 행복과 희열은 결코 불건전한 것이 아니었다. 관능적이고 부정한 상태와 전혀 무관한 행복과 희열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알게 모르게 고행수행자들을 억누르던 희열과 행복에 대한 거부감 자체가 오도된 선입견이었음을 인식한 것, 그것은 위대한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추구해야 할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피해야 할 행복과 즐거움을 분석하는 일종의 알아차림이었다.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해 회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깨달음.

p230 '중생이란 마치 생명이 없이 조건에 따라 흘러가는 이 바리때(공양그릇)와 같다. 물살에 휩쓸려 그저 흘러갈 뿐이다. 왜 중생들은 이 죽어 있는 바리때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생명이 있는 중생은 생명이 없는 바리때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생명이 있는 중생은 생명이 없는 바리때와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더 이상 의미 없는 기존의 관습과 의례, 그리고 검증될 수 없는 믿음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어떤 스승도 추종할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지난 6년의 세월이 내게 준 교훈이다. 이제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p237 아자빨라나무(반얀트리)를 등지고 길상초를 깔고 가부좌를 틀고, '이제 이 자리에서 나의 육체가 소멸되어도 좋다. 어느 시대 그 누구도 얻지 못했고, 지극히 얻기 어려운 완전한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을 것이다.'


대각(大覺) 깨달음


싯다르타는 의도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들과 해로운 법들을 떨쳐냈다. 그러고는 들숨날숨의 호흡을 관찰하면서 일어나는 사유와 지속적인 생각과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심일경성(삼매)을 성취했고, 그러자 모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떨어져나가면서 희열과 육체적 즐거움이 또렷하게 나타난 초선에 머물렀다.
싯다르타는 곧 초선정에서 나와(출정), 자신의 마음을 반조해 보면서 몸과 마음의 모든 대상들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생명)의 현상을 보며 무상(無常)과 고(苦)를 보았고, 무아(無我)를 보았다. 희열과 즐거움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싯다르타의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 무상, 고, 무아, 염오(厭惡), 이욕(離慾)을 보며 제2 선정-제3 선정-제4선정에 들었다 나왔다. 

p242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그에게 해탈했음을 스스로 아는 지혜가 생겼다. 그 순간 싯다르타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알게 되었다. 드디어 무명과 집착과 혐오와 미혹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것이었다. 일체의 탐욕이 사라졌으므로 내생(來生)의 원인 또한 제거되었다. 고통의 수레바퀴와 같은 삶의 순환은 완전하게 멈췄다. 생사를 걸고 아자빨라 나무 아래 앉은 지 꼭 18시간이 지난 뒤였다. 

p256 세상 사람들은 신과 영혼이 뒤얽혀 있는 관념의 굴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기 어렵다. 제의와 의례의 신앙, 깜마(업)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 그들에게 영혼은 독자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후에 영혼이 생존하는 것도 아니라는 나의 교의를 수용하도록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그런 인간들을 이기심을 버리고 정도(正道)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나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이면서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도리어 성가신 일이 도리 것이고 나에겐 곤혹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출가 후 6년 만에 그 누구도 실행해 본 적이 없는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사유와 탐사, 통찰을 통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 붓다는 온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얼마나 요원하며 지난한 일인지를 알았다. 
 

깨달음의 정리

 

깨달음을 언어화, 체계화 하는 과정은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했다.
 
p262  일체의 편견을 지워버린 붓다의 눈에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것은 서로 기대고 의존해 발생하고 소멸하는 실상이었다. 또한 존재하는 사물들 가운데 영구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가 그의 안목에 훤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영구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원리가 모든 것들이 우연히 발생하고, 아무런 질서도 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붓다는 사물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나름의 패턴을 체계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붓다는 어떤 현상이나 대상들이 어떤 이유, 또는 조건에 의해 발생했는지를 세밀히 살폈다. '조건에 의지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이 감관을 통한 경험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붓다는 주어진 현상들을 주변 조건과 함께 인식할 때 존재를 둘러싼 의혹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붓다는 '조건에 의지한 발생', 즉 연기법(緣起法)이라는 보편원리를 공식화할 수 있었다. 사물은 바로 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 즉 조건에 의지해서 발생하여, 의삼할 나위없는 과거로부터 아득한 미래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이 결국 소멸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든 존재는 과정과 진화의 산물이다. 한 생명은 이런저런 조건에 의지해서 이 세상에 나온다. 부모는 수없이 많은 조건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갓 태어난 생명이 완전한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 속에 의식이 일어난다. 부모는 이 의식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제공한다. 이 조건들이 조화를 이루며 한 개인이 형성되어 간다. 그 의식도 자발적이거나 조건 없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성향과 과거의 갈망, 그리고 과거의 집착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또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자의 성향이다. 삶에 대한 갈망과 집착과 성향들이 새롭게 생성된 존재의 의식을 형성한다. 이것들은 흘러가는 존재의 물줄기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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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끝없는 탐욕과 갈망이 영원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난다. 이 원리를 아는 현명한 사람은 탐욕을 제거하고 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길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현명한 이는 세상의 사물들에 집착하지 않으며, 영원불멸하리라고 여겨지는 신화적 자아, 혹은 영혼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러한 견해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세상의 때에 더럽혀지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다.  마치 더러운 물속에서 자라면서도 그것에 물들지 않고 솟아 피어나는 연꽃과도 같다. 현명한 이는 세상의 때, 갈망과 탐욕, 미움과 증오, 무지와 미혹에 물들지 않은 채 살아가는 자이다. 그러므로 현자는 여기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또한 이 세상에 살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생존은 둑카(dukkha), 즉 괴로움이라는 진리라네.
이것을 괴로움(苦)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는 것이네. 나는 이것을 알아내었네.
태어남도 고통이고, 늙는 것도 고통이며, 병드는 것도 죽는 것도 고통이고, 슬픔과 비탄, 고통과 근심, 절망도 고통이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게 되는 것도 고통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게 되는 것도 고통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고, 육체와 느낌, 지각, 성향, 의식이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 모두 고통이네.

그런데 이 괴로움이 일어나는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네. 이것을 고통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는 것이지. 나는 이것을 알아내었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渴愛)이고, 갈애는 열망과 환희를 수반하고 여기저기 즐기고 만족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네. 이것이 태어남의 원인이 된다네.

벗들이여. 그렇다고 인생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네,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통은 사라지기 때문이네. 이것이 고통을 극복하는 성스러운 진리라네. 갈애를 내려놓아 남김없이 소멸하면 갈애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네. 이것이 곧 해탈이요. 평안이요. 인간의 월등한 경지, 즉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네."
 
"갈애를 소멸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도덕, 명상, 지혜로 구성된 여덟 가지 실천이지. (=8정도) "
바른 견해 (正 見)_ 치우치지 않는 중도
바른 생각 (正 思惟)_ 의도, 목적, 계획
바른 말 (正 語)
바른 행동 (正 )
바른 의식주 (正 命)_생계(날개 무게로만 나는 새처럼)
바른 노력 (正 進)
바른 기억 (正 念)_알아차림, 기억챙김
바른 집중 (正 定)_삼매
 
p278~281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다양한 조건에 의지하여 발생되는 것이네. 새싹은 종자의 번식력과 유효한 습기, 흙의 정기에 의존하여 발생한다네. 종자에서 움이 텄을 때, 우리는 새싹을 발생시킨 배경을 살펴보고, 이러이러한 조건들이 싹을 트게 했다고 말하지. 만약 싹이 나오지 않을 때는 이러이러한 조건이 결핍되어 싹이 트지 않은 거라고 단정한다네. 이것이 바로 의존적 발생의 원리 곧 연기의 법칙이라네. 이것이 존재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발생함으로써 저것이 발생한다,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 소멸된다,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본성이며, 그들이 생성되는 방식이라네. 
 
내가 말하는 조건에 의지해서 발생하는 원리는, 단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향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인간의 성향, 즉 개성 또한 조건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그렇다고 성향이 전적으로 수동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적극성을 띠고 창조적이기도 하다. 꼬살라 왕국의 호화로움을 보라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인간이 가진 성향의 소산이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 또한 끝없는 탐욕과 괴로움, 좌절의 원인이다. 제자들이여, 그러나 이와 같은 성향이 완전히 평정된 것, 모든 집착이 끊어진 것, 탐욕이 없어지고, 갈애가 사라진 것, 이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이다. 그 자리는 범부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해탈은 탐욕과 증오, 미혹으로부터의 자유밖에는 없다.
목숨이 붙어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더 이상의 해탈은 있을 수 없다.
그는 늙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쇠약해지고 병드는 것,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다만 그가 탐욕과 증오와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공포나 좌절, 그리고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존속하는 동안 획득할 수 있는 최상의 자유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더 이상의 것, 절대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부질없는 망상일 뿐이다. 이는 영원불멸의 생명을 갖고, 변화 속에서도 영혼을 영속시키려는 어리석은 것이다. 즉 영원한 생명, 절대적 영혼에 대한 동경이요, 갈망이다. 그러나 끝없는 인과의 고리인 이 우주 안에서 제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고, 결과가 되는 절대적인 존재란 없다. 갈애가 사라짐으로써 미움과 미혹도 없으며, 나에게 이제 존재에 대한 집착은 없다. 존재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생명에 연연하지 않으며, 생명에 매달리지 않으므로 이생이 끝난 다음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윤회는 끝났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 없는 무사의 경지요.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경지가 아닌가? 이것이 바로 불멸이며, 완전한 해탈이다."
 

무아(無我)

"육체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아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자아라면 병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육체는 조건에 의지해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므로 늙고 병들 수밖에 없다. 자율성이 없는 이 육체는 자아가 아니다. 우리들의 감각(受), 인식(想), 성향(行), 그리고 의식(議)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무상한(영원하지 않는) 육체는 괴로움의 근원이다. 괴로움의 원천인 것을 내 것이라거나, 나의 영원한 자아, 나의 영혼이라고 여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무상이고, 괴로움이고, 수시로 변하는 것이라면 이를 나, 내것, 자아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육체는 내가 아니다. 내것이 아니다. 내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르게 통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느낌이 어떻건, 지각이 어떻건, 성향이 어떻건, 의식이 어떻건, 이것은 내가 아니며, 내 것이 아니먀, 내 자아가 아니라고 바르게 통찰해야 한다. 
영원불멸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은 상상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것은 착각이다.
 
p291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 적대하지 말고, 애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p297 신들은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 오직 인간만이 완전한 생사로부터의 자유, 해탈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29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집착을 벗어나 마음의 해탈을 얻는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마음이 해탈한 이는 '나는 이미 해탈했다'라고 자각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윤회의 굴레에 속박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나를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의 근본을 끊어야 한다.)
p341 이 세계에서 누리는 행복과 즐거움은 허망한 것이다. 오욕의 즐거움은 몸에 묻은 때와 같다
 
p336 나는 살아있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어떤 것도 옹호할 수 없습니다. 윤회를 끝내는 것과 존재하는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입니다. 일단 존재하게 된 생명은, 설령 자기 자신일지라도 파괴할 권리가 없습니다. 악행이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과 함께 자신을 행복으로 이끄는 행위가 곧 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발견한 진리가 바로 그것이며, 그것이 곧 정의입니다. 
 
p356 목갈라나가 수계 한 지 7일째 되는 날 맹렬히 정진하고 있던 중 피로와 졸음(혼침)이 엄습했고, 붓다가 말했다.
"목갈라나여, 그대가 어떤 인식을 가져서 머물 때 혼침이 생기면 그런 인식을 그대는 가지지 말라.
목갈라나여, 그대가 이와 같이 머물러도 혼침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대는 들은 대로 배운 대로 법을 사유하고 고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해야 한다. 그래도 제거되지 않으면, 법을 자세히 독송해야 한다.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두 귓불을 잡아당기고 손으로 사지를 문질러라. 그래도 혼침이 제거되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눈을 씻고는 사방을 둘러보고 별자리와 별들을 쳐다보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낮이라는 인식에 집중하라. 그래도 혼침이 제거되지 않으면 감각기능을 안으로 들이켜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도록 한 채 앞과 뒤를 똑바로 인식하면서 경행에 마음을 확고히 하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언제 일어날 것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잘 간직한 채 마음을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발로써 발을 포개고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누워도 된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면 '나는 드러눕는 즐거움이나 기대는 즐거움이나 자는 즐거움에 빠지지 ㅇ낳으리라.'라고 생각하면서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
 
p362  즐거운 느낌도 꺼려하고, 괴로운 느낌도 꺼려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꺼려한다. 꺼려하기에 탐욕이 빛바랜다. 빛바램으로 해탈한다. 해탈한 비구는 누구를 편들지도 않고 누구와 논쟁하지도 않는다.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말에 집착하지 않고 사용할 뿐이다
 
p365 사라붓따가 아라한이 사후에도 존재하는지, 윤회가 끝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에 붓다가 말했다.

" 나는 거기에 답할 수 없다. 그것은 적절치 못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절대 유(有)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아라한이 죽은 다음 불멸의 행복하느 경지에 머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無)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라한이 사후에 완전히 소멸될 뿐이라고 고집한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알 도리가 없는 나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차라리 침묵을 택하겠다. 불꽃이 꺼진 뒤, 그것이 사라져 없어진 뒤, '그 불꽃이 간 곳은 어딘가, 동쪽인가, 아니면 서, 남, 북쪽인가?'라고 묻는 것은 적절한가?"
" 알 도리가 없다. 불꽃을 일으키는 필수적인 조건이 사라진 이상, 그 불꽃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후의 아라한을 존재한다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존적 발생의 원리를 수락하고 그 원리 속에서 살아 있는 아라한에 대해 논의한다면, 그대는 아라한의 사후에 대해서 묻지 말아야 한다."
 
p368 세계가 영원하건 말건, 공간이 무한하건 말건 괴로움은 존재한다. 이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제거될 수 있다. 그와 같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사라붓따, 만약 그대가 독 묻은 화살에 맞았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는 화살을 빼내기 전에 그 화살이 어느 방향에서 왔는지 알아야 되겠다고 고집하겠는가? 누가 활을 쏘았고, 그는 어떤 계급 출신이며, 피부색은 검은지 흰지, 천민인지 귀족인지 알아야 화살을 빼겠다고 하겠는가?
이와 같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답이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과 무관한 의문 또한 그렇다. 그대는 그대의 생을 허비하고자 하는가? (이 세계가 시공간적으로 무한한지, 영혼과 육체가 동일한 것인지 아닌 등에 생을 허비하지 말라)

p379 "깟사빠, 그대는 신분의 우월함을 버리고 선배와 후배와 동료들 사이에서 항상 신중함을 보여야 한다. 깟사빠, 그대는 식견의 우월함을 떨쳐버리고 어떤 법을 듣건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며 깊이 사유해야 한다. 깟사빠, 그대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데 대한 자만심을 버리고 항상 게으르지 말며 즐거운 마음으로 부지런히 수행해야 한다." 
 
 
p389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서 가정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이라도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면서 얻을 수 있는 네 가지 행복이 있습니다. ①자신의 노력으로, 도덕적인 수단으로 부를 소유할 때 행복과 만족감 ② 부를 누리고, 덕스러운 활동에 참가할 때 체험하는 행복 ③ 빚지지 않는 것으로부터 오는 행복감 ④ 정갈하고 남들의 비난을 받지 않는 자신의 생활에 대해 오는 행복감이 그것이다. 
 
p518 세속에 사는 재가자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에 대해 붓다가 대답했다.
"믿음(saddha), 정진(viriya), 알아차림(sati), 마음집중(samadhi), 빤냐(panna,지혜)가 행복을 성취하게 하는 다섯 기둥입니다. 이 다섯 기둥을 늘 간직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처음부터 완벽하게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점진적 수행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의 조건은 첫째, 깨달은 사람의 말에 자주 귀 기울이는 것. 둘째, 그가 가르치는 교의가 애매모호한 것은 아닌가? 실제 경험에 근거한 것인가? 어떤 특정한 시대나 장소에 한정된 것은 아닌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두루 입증되는 보편타당한 이론이며, 성자들에 의해서 지금도 실천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점검하도록 하십시오. 셋째, 그들의 제자들에 대해 숙고하십시오.  그들의 행실이 고결하며 솔직하고 바른가? 청정하게 살면서 이웃에 봉사하고, 훌륭한 도의와 모범이 되고 있는가? 이렇게 점검하도록 하십시오. 넷째, 자신의 도덕적 자세를 비판적으로 숙고하십시오. 내 행위는 무조건 올바른 것인가? 혹 방종하며, 고집불통이고 독단적이지 않은가? 명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다섯째, 자신의 착하고 관용적 자세를 비판적으로 숙고하십시오. 내 생활이 탐욕에 예속된 허위의 삶은 아닌가? 검소하고 낭비를 자제하며 살고 있는가? 이웃에게 인색하지 않고 널리 보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렇게 점검하면서 행복의 다섯 기둥을 성취하도록 하십시오. 

p414 "깔루다이, 우리는 이 세계에 홀로 태어난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존재는 부모님들에게 부분적인 책임이 있고, 또 보호하고 살필 의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더구나 과잉보호는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에게 의존하게 하며,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거기에 대처할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구도, 조물주라고 불리는 브라흐마조차도 우리를 구언하거나 완전을 성취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밖에 누가 있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p422 자신의 아버지 숫도다나 왕에게 붓다가 말했다.

"출가한 아들에 대한 애정에 못지않은 자비심으로 백성들을 보살피십시오."

"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않고 나의 모든 성향들을 진정시키며, 모든 갈망과 미움과 미혹을 제거함으로써 나는 괴로움과 불만의 끝에 도달했습니다. 마치 흙탕물 속에서 자라는 연꽃이 물 밖으로 솟아올라 더러움에 젖지 않듯이, 나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은 채 있습니다. 물에 젖지 않은 채 시들어갈 연꽃처럼, 목숨이 다할 때 나는 지혜로운 현자들과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사라질 것입니다."

p459 브라만교 지도자들은 자기네 종교의 운명에 불안을 느끼고, 그 가운데 자누쏘니라는 지도자가 붓다에게 '만물에 대한 견해'에 대해 물었다. 붓다는 그들이 최초의 물질, 또는 영원한 자아처럼 '어떤 실재'라는 말은 경험에 근거할 수 없는 사변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만물이란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피부와 접촉대상, 그리고 두뇌와 개념처럼 감각기관과 거기에 대응하는 감각대상으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그와 같은 경험을 근거로 생각하는 것을 떠나서는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감 혹은 육감과 관계없이 인식하고 알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런 식으로 인지하고 볼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만물의 본질에 관한 그들의 어떤 견해에도 동감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그와 같은 본질이란 경험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명상을 통하여 평정된 마음의 최고 단계인 수상멸처(受想滅處), 즉 모든 인식과 감각이 완전히 소멸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만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보거나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혹자는 그런 식의 인식능력을 주장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어떤 경험도 없는 나로서는 어떤 단정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에 나는 차라리 침묵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세상이 나와 다투기를 원한다고 해도 나는 침묵으로써 세상과 다투지 않습니다."

P462 "이 세상 사람들은 세계에 관한 두 가지 견해, 즉 존재(절대 유)와 무(절대 무)의 견해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주장하거나 부정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들의 의미와 암시를 면밀히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경험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 둘째는 존재 그 자체, 셋째로 실체 혹은 본질의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의미들은 동일한 것인가?  다르다.

철학자들이 하고 있는 것은 존재한다고 단정된 어떤 사물로부터 존재를 추상하는 것이다. 그들은 추상명사 '존재'라는 것이 동사 '존재한다'로 표현된 어떤 사물을 초월하여 선행하는 '실재'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역 혹은 대상이 존재한다는 말은 완벽한 의미를 가지지만, '이것의 존재가 존재한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누군가 추상적 의미의 존재를 믿을 때, 그것은 '만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두 가지 모두 영구불멸의 믿음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누군가 추상적 의미의 무(無)를 믿을 때도 '만물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두 절멸의 믿음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원불멸과 절대무의 양극단에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생겨나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세계를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물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 무를 믿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또한 사물이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불멸을 믿는 것도 잘못이다. 내가 가르치는 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인연에 기반, 업)의 원리는 이 양극단을 벗어난 중도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세계에 관한 올바른 견해다."


P473 붓다의 하루 일과는 이처럼 하루 두 시간 숙면과 휴식, 적멸의 삼매에 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중생을 향한 자애, 즉 설법과 지도에 맞춰져 있었다. 
 
p562 왕비여, 자세히 보십시오. 무너지지 말라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름답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그것의 본성은 아름답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사랑해 쓰다듬고 보듬어 보지만 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입니다.
당신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 보기 좋다고 여기는 것, 거기에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떨치고 자세히 보십시오. 나와 너가 실재하는 것이라 생각해선 안 됩니다.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그로 인해 교만심을 일으켜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p572 인기가 치솟는 붓다에게 악감정을 가진 이가 깡패와 건달들을 매수해서 모욕적인 말로 비방하기에, 아난다가 다른 도시로 가기를 청할 때, 붓다가 말했다.
"아난다여,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어려움이 일어나면 어려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려야 한다. 어려움이 가라앉은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아난다여, 우리에게 욕설과 비방을 퍼붓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전쟁터에 나간 코끼리와 같다. 전쟁터에 나간 코끼리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참고 견디듯, 나는 사악한 자들이 내뱉는 말을 참고 견딘다." 
 
"남들이 나를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상가를 비방하더라도 거기서 적대감을 가져서는 안 되고 기분 나빠해서도 안 되고 마음으로 싫어해서도 안 된다. 그대들이 거기에 자극받아서 분노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장애가 된다. 그대들은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
붓다는 '증오는 결코 증오로 극복할 수 없으면, 오직 증오하지 않음으로 가라앉는다.'고 강조했다. 
 
p583 "악기를 연주할 때 현을 너무 팽팽히 조이거나, 지나치게 느슨하면 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진리의 길을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의욕이 지나쳐 너무 급하면 초조한 마음이 생기고, 열심히 하려는 뜻이 없으면 태만으로 흐르는 것이다. "
 
p591 사별한 생모와 하늘세계 사람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셨다.
"삼계의 중생이 경험하는 것은 괴로움과 즐거움 두 가지 길입니다. 이제부터 괴로움과 즐거움의 구렁텅이에서 떠나야 합니다. 세상사람이나 하늘사람이나 지니고 있는 몸은 다 사대(지수화풍)와 사온(수상행식)이 화합하여 거짓 신명을 구성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어서 내 것이라고 할 주체가 없는 것이며,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고 죽음의 존재이며 마침내 고통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보아 깨닫는 이는 바로 삼계의 굳은 감옥을 깨뜨리고 닙바다(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수화풍 : 땅, 물, 불, 바람
*수상행식 : 受想行識, 감각, 인식, 성향, 의식. 마음의 작용.
*삼계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세계. 욕계에 속하는 세계로는 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 인간의 세계와, 천(天)의 세계로 나뉘는 6도(六道)가 있다. 이 세계의 욕심은 크게 식욕(食慾)·색욕(色慾)·재욕(財慾)·명예욕·수면욕으로 대별되며, 이러한 욕심들 때문에 항상 산란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
색계욕심은 떠났지만 아직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일으키는 미세한 진심(瞋心)만이 남아 있는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이다. 무색계 탐욕과 진심이 모두 사라져서 물질의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아직 ‘나[我]’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여 정신적인 장애가 남아 있는 세계이다. 중생이 사는 세계 가운데 가장 깨끗한 세계로서 미세한 자아의식으로 인한 어리석음만 떨쳐버리면 불지(佛地)에 이르게 된다 _ [네이버 지식백과] 삼계 [三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p599 이렇게 아프고, 서글프고, 두려워질 땐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 늘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나의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p617  " 그대들이 어질고 지혜로운 동반자, 성숙한 벗을 얻는다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면 코뿔소의 불처럼 혼자서 가라. 결박을 벗어난 사슴이 초원을 자유롭게 뛰놀듯,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떠나듯, 상아가 빛나는 힘센 코끼리가 무리를 벗어나 숲을 거닐 듯, 물고기가 힘찬 꼬리로 그물을 찢듯이 모든 장애와 구속을 벗어나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과 진흙이 묻지 않는 연꽃같이.
 
p671 내생(來生)이 없다면, 깨끗한 삶을 부정하고 악행을 저지른다고 해도 죽은 다음에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생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가 말하는 대로 방탕하게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생도 내생도 다 잃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생과 내생 모두 괴로움으로 이끄는 사람의 말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설령 내생이 없다고 하더라도 선하게 이생을 보낸 사람은 그렇게 한 세상을 잘 산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좋은 곳에 복되게 태어날 것이다. 내생이 없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잘 산 사람은 바른 견해를 가진 고결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따라서 이 사람은 이생과 내생을 모두 얻은 것이다. 
 
많은 종 가운데는 다른 생물을 포식하는 것도 있고, 순전히 풀을 먹는 것, 인간의 배설물로 사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 살고, 그 속에서 죽는다. 어떤 것은 물속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고 죽는다. 그들의 생존과 그대들의 삶을 견주어 보라. 실로 우리는 복 받은 존재들이다. 이 인간의 생명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어렵게 만난 이 인간의 생을 , 이 귀중한 생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팔정도는 그대 자신과 남들의 귀중한 삶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설해진 것이다. 
 
p678 제자들이여, 조건에 의지해서 발생하는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른 노력은 삶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조건에 의지해 발생하는 원리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닌 한,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여지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인간사회는 마치 노 없는 배처럼 그저 흐름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 우선 예방하기 위해 노력한다. 
 
p683 사라뿟따가 라훌라에게 말했다. "라훌라여,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아라.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고 많은 공부를 하면 더 큰 진전과 큰 공덕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라훌라는 붓다에게 물었다. "어떻게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고 어떻게 많이 공부를 하면 큰 결과와 공덕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라훌라의 질문을 들은 붓다는 들숨날숨에 마음을 챙기는 수행방법보다는 라훌라의 열망과 욕망을 제거하게 돕기 위해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에 대한 설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P697 인간의 기억이 바로 시간의 기원이다. 인간에게 기억능력이 없다면 시간 감각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무언가를 기억하면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시초를 말할 수는 없다. 오직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몸뚱이는 죽은 고기 덩어리가 아니라 기억하고, 느끼고, 인식하고, 깨어 있는 마음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깨달은 자는 시간에 먹히거나 시간에 제한당하지 않는다. 
 
p714 악한을 쫓아버리기 위해 신통력을 사용하면 어떻겠습니까?"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자신의 행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스스로 포기하는 방법이 더 오랜 효과를 내게 할 수 있다. 신통력으롤 사용하는 것은 지속적인 효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힘을 과시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게 하는 방법이 더 좋은 것이다."
 
p747 깔라마인들이여, 오직 이것만이 참이요, 나머지는 모두 그릇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을 참인지 그릇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탐욕과 증오와 미혹에 의해 유발된 소행이 악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뢰하고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사람이 탐욕과 증오와 미혹에 자극된 사람인지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가능합니다. 그것이 곧 가장 정확한 잣대가 될 것입니다."
 
p748 사물이 일어나도록 한 조건들을 무시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그것들은 의존적으로 발생해 왔습니다. 사물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어떻게 소멸하는지 신중하게 숙고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악을 피하고 선을 증진시키게 합니다. 
 
p752 "인정이나 부정은 절대적이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항상 기억하라. 항상 제3의 길, 두 극단을 지양하는 중도가 있다는 것을! "
 
"나는 감각적 쾌감으로부터 초연함으로 생겨나는 기쁨과 행복을 훨씬 수승(殊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온전한 집중과 평정으로 이루어진 제4 선정에서 진정한 출가의 행복과 평화 그리고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이 내적인 평온은 외적인 평화의 바탕이다. 그런 사람은 항상 자비심으로 사람을 대할 것이다. 설령 남의 비밀을 이야기하거나 남이 싫어하는 소리를 하더라고, 그것이 진실이고 사실이며 결실이 있는 경우에만, 그것도 적절할 때에만 할 것이다. 
이것은 대화하는 태도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서둘러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을 해칠뿐더러 의사전달도 제대로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대화에 서툰 사람이다
 
p756 언어는 대화의 수단이며, 체험의 표현이고, 항상 변하는 흐름 속에 떠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의 용법이 중요하다
 
p822 업보란 하늘로 옮길 수도, 쇠그물로 덮을 수도 없다. (=까르마)
p851 살인청부업자들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온몸에 심한 상해를 입은 목갈라나가 말했다. "내가 지은 업보는 매우 깊고 무거운 것이네, 그 갚음은 언젠가 받아야 하는 것이므로 피하지 않았네"
 
p903 "사문에는 네 종류가 있습니다.
도를 실천함이 뛰어난 사문,
도를 설하는 것이 뛰어난 사문,
도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사문,
도를 행하는 척하며 악만 저지르는 사문.
세상에는 훌륭한 사문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마무리

 

한자를 알면 책을 읽는 데 좀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불교용어엔 한자어가 많으니까요.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고,
증명되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와중에 많은 것을 얻어가는 책이었습니다. 
 
붓다는 영원불멸의 자아를 부정하며,
경험되는 모든 것들을 의지해서 발생한다는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올바른 길이란,
금욕주의자가 되어 열반을 얻기 위한 완전한 자기 평정을 수행하는 것.
 
내 것이 아니다.
나도 아니며, 
나의 자아도 아님을 관찰하라.
 
무상을 자각하고
무아를 자각하면
열반에 이른다.
 
책에서 "중생이란 마치 생명이 없이 조건에 따라 흘러가는 바리때(공양그릇)와 같다"고 했지요.
[사회적 원자]가 생각났습니다. 거기서 우리 인간들은 무리를 지으면 뇌가 없는 사람처럼 휩쓸려 버린다는 사례를 봤지요. 그래서 참된 동료나 스승이 없다면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하나 봅니다.
 

제가 새롭게 얻어간 것은,

 
의존적 발생의 원리. 와..... 저는 그런 깨달음이 너무 놀라웠어요. 
조건에 의해 생겨난 이 모든 것이 결국 소멸될 수밖에 없다.. 소멸되는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해져.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해탈탐욕과 증오, 미혹으로부터의 자유밖에는 없다. 목숨이 붙어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더 이상의 해탈은 있을 수 없다.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더 이상의 것, 절대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부질없는 망상일 뿐이다. 이는 영원불멸의 생명을 갖고, 변화 속에서도 영혼을 영속시키려는 어리석은 것이다. 즉 영원한 생명, 절대적 영혼에 대한 동경이요, 갈망이다
- 그러니 헛된 갈망 버려라.

③ 시초, 영혼, 사후세계, 영원불멸 등의 헛된 질문에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 독화살을 맞았는데 누가 쐈는지 알아보는 게 먼저가 아니라 화살을 뽑는 게 먼저다.

④ 신들은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 오직 인간만이 완전한 생사로부터의 자유, 해탈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세계와 하늘세계모두 욕심으로 가득 찬 자들의 욕계의 세계이고, 신들은 인간을 부러워한다.
그러니 혹, 유체이탈이나 그릇된 명상, 집착의 명상, 그릇된 목적으로 행해지는 행위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튜브, 도서를 보면 잘못된 정보들도 넘쳐나는 것 같아요.

의존적 발생 원리를 보니,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_2024. 카를로 로벨리 _ 이란 책이 떠오릅니다.
양자역학에 관한 책인데요. 저자는 양자현상을 대상 간의 상호작용으로 봤습니다. 아무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처음부터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한 관계적 존재_ 붓다의 의존적 발생 원리와 너무 비슷하게 보여요.




삶의 태도와 부모의 마음가짐 / 밀레니엄 바이블 - https://naturalmedicine.tistory.com/m/168

삶의 태도와 부모의 마음가짐 / 밀레니엄 바이블

책에 편견과 선입관을 둔다면, 지식도 한쪽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전 어떤 책이든 제 맘에 와닿는 구절이 있으면 좋은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좋았던 부분을 다같이 느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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