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수양_책

이슬람 눈으로 본 세계사

키다리 가로등 2023. 11. 2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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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눈으로 본 세계사
_2011 타밈 안사리

저자는 이슬람 문명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성장했고, 그 후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이슬람 가문, 어머니는 미국인으로, 어쩌면 그래서 좀 더 객관적으로 이슬람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책을 보았습니다.
 
이야기 형태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책은 좀 두껍지만) 쉽게 술술 재미있게 읽혀나갑니다.
 

이슬람 교리의 구조


저자 서문
내가 ‘이슬람세계’라고 할 때는 무슬림이 인구 중 다수고/다수거나, 통치자가 무슬림인 사회를 의미한다.

9/11 이후로 서구의 비무슬림들은 이슬람이 무엇이며 무슬림은 어떤 사람들이며 이슬람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들, 이란에서 일어난 소요사태, 알제리의 저항 세력들, 필리핀과 또 다른 지역들, 중동에서 일어난 비행기 납치와 자살 폭탄 테러, 이슬람 정치 세력들의 갈수록 강화되는 극단주의, 이제는 탈레반의 출현까지. 분명 역사를 잘 들여다보면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알 수 있을 터였다.

두 세계사(서구/이슬람)는 같은 장소에서, 고대 이라크의 영토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출발했으며 지금은 다시 같은 장소에, 일견 서구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주요 선수들인 듯 보이는 세계적인 싸움판에 도달했다.

유럽 문명이 이슬람세계로 확장해나가던 시절, 유럽이 ‘확장’했을 때,  그들은 지구상 모든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국,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반도 주변지역, 인도 아대륙까지 퍼져나갔다. 모든 지역에서 ‘근대화’바람을 수용해야만 했지만, 서구의 지배에 맞서 분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각지역의 고유한 이야기들은 계속 질주하며 실제 사건들을 빚어냈다.

전통적으로 서구의 세계사는 ‘지금 여기’를 민주주의 산업문명으로 상정한다. 여기에 더해 미국에서는 세계사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미국의 건국 이념을 이끌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이 지구를 미래 사회로 이끄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류 전체가 한 방향으로 향해 간다고 쉽게 간주해버리는데, 늦게 출발했거나 천천히 움직여서 흐름에 뒤처진 나라를 ‘개발도상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서구의 눈으로 본 세계사
1. 문명의 탄생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2. 고대 (그리스와 로마)
3. 암흑시대 (그리스도교의 부상)
4. 부활 : 르네상스와 개혁
5. 계몽 (탐험과 과학)
6. 혁명 (민주주의, 산업, 기술)
7. 민족국가의 부상 : 제국을 향한 투쟁
8. 제1,2차 세계대전
9. 냉전
10.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1. 고대 :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2. 이슬람의 탄생
3. 칼리프조: 보편적 통일체를 향하여
4. 분열: 술탄 제국의 시대
5. 재앙: 침략자들과 몽골족
6. 부활: 3대 제국의 시대
7. 서양의 동양 침투
8. 개혁 운동
9. 세속 근대주의자들의 승리
10. 이슬람주의의 반발

대부분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현재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와 서구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두 개의 우주 같았다. 17세기 후반에야 서로가 교차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둘은 서로를 거스르는 물결이었기 때문에, 한쪽이 물러나야만했다. 그런데 서구가 더 강력했으므로 서구의 물결이 이슬람을 압도하고 휘저어놓았다.

현재 세계 분쟁 지역의 지도를 그려보면 - 카슈미르, 이라크, 체체니아, 발칸 반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라크-공식적인 지도에서는 사라졌어도 죽지 않으려고 여전히 몸부림치는 독립체들의 경계선을 표기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지금부터 전하려는 이야기이며, 나는 ‘이야기’를 강조하려 한다. 나의 가장 큰 목표는 무슬림들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지중해전의 해상통행로로 ‘서양문명’이 출현했고, 지중해전과 중국사이 중간세계(흔히 ‘중동’이라 불리는)가 출현했다. _ 이 사이의 지역은 초창기부터 정착민과 유목민 사이의 싸움이 반복되는 분쟁이역이다. 지형적으로 평원이라 어느 방향에서든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탄생 직전 배치도

비잔티움, 사산제국 사이, 두 세계의 역사가 중첩되면서 오늘날까지 고질적인 분쟁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것이 이슬람이 태어나기 직전 중간세계의(중동) 배치도이다.
 
서기 6세기 후반 '아라비아 해'근처 도시는 교역의 현장으로 여러 유대 부족은 아랍부족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아랍인 유대인 모두 셈족이었으며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아담이다. 아랍인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로부터 혈통이 유래했다고 여긴다. 이를테면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 모세와 파라오의 이야기등은 아랍전통에 속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문화와 생활방식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홍해 연안에 자리한 거대한 국제도시 메카에서 나고 자랐다. (570년 출생) 무함마드는 만물을 모두 아우르며 보편적인 유일신이 있다고 설교했다. 알Al은 아랍어의 정관사이며, 알라Allah는 유일신을 뜻한다. 이는 이슬람교의 핵심이다. 
메카의 사업을 주도하는 이들은 종교, 관광, 사업으로 한 몫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함마드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느꼈다. 유일신 개념이 대세가 되면 다른 신을 섬기는 신자들은 메카에 오지 않을테고, 사업이 망할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메카는 주점, 도박, 성매매 등 유흥사업소득도 컸다. 무함마드는 이에 암살 당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미리 알아채고 메카를 몰래 빠져 나왔다. _ 무슬림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도피한 사건을 '히즈라'라고 한다. (영어에서는 종종 헤지라 라고 쓴다) 12년뒤 무슬림의 달력을 만들 때 히즈라를 기원으로 삼았다. 히즈라는 무슬림들에게 운명의 전환점이며, 시대를 히즈라 이전(BH), 히즈라 이후(AH)로 나누는 기준점이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무슬림 공통체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종교이기는 하나 종교가 아닌 정치, 경제, 사회, 법체계를 두루 갖춘 문명이다. 개인의 구원이 아닌 정의로운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는 게 목표였다. 
 
메디나의 무슬림 공동체가 커지자 유대부족들은 불안해졌다. 메카인들도(쿠라이시부족) 계속 무함마드 제거를 시도하였다. 중간세계에서(중동) 소규모 전쟁은 풍토병이나 마찬가지 였는데, 무슬림 공동체는 서로 싸우지 않는 '평화로운 영역'으로 정의 공동체였고, 그 외 지역은 여전히 전쟁의 영역에 살고있었다

무함마드가 죽고, 사람들은 다시 왕같은 인물이 필요했고 대리인의 시대(칼리프 시대)가 탄생했다. 아부 바르크 지지자와 알리(무함마드 사위)지지자 사이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알리 지지자) 생겨난 것이다.

- 제 1대 칼리프(대리인)는 아부바르크.
- 제 2대 칼리프 우마르 때에는 정복전쟁으로 이슬람이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지하드 : 원래 사회정의 운동의 '투쟁'을 의미. 무장투쟁도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정당화 됨. 그러나 우마르가 정복전쟁을 ’지하드‘라고 부르기로 함. 평화의 영역이 었던 무슬림 공동체에서 전쟁영역으로 변모하기 시작 ) 3년안에 아랍인들은 수 세기 동안 로마 제국과 정면으로 맞서던 사산제국 하나를 끝장냈다. 그 후 예루살렘도 정복했다. 비잔티움 군주는 그리스도교에 종교적 자유도 허락하지 않고 세금도 많이 걷어간 반면, 무슬림은 그렇지 않았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복전쟁을 했지만 약탈하지는 않았다. 칼에 의한 개종도 없었다.
- 제 3대 칼리프 우스만(아부바르크의 친구이자 무함마드의 사위) 규모가 커진 이슬람의 통치에서 부패의 기미가 생겨남. 우스만의 경제의 자유를 믿었다. 우스만의 측근들은 부유해졌고, 이집트에서는 세금문제로 폭동이 일어났다. 이집트 폭도들은 칼리프를 새로 임명하라고 위협하였고 우스만은 살해당했다.
- 제 4대 칼리프 알리. 분열이 시작됨.

무함마드가 동굴에서 받은 계시에서 시작되어 히즈라를 거치고 거의 40년 뒤 무함마드의 네 번째 계승자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 극적인 이야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부터 십자가형,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이슬람의 핵심적인 정교 우화를 형성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기본법규와 정신은 비슷하다. 세부사항이 약간 다르긴 해도 다른 부분을 단 5곳이라도 찾아낼 무슬림은 천명중에 한명도 안될 것이다. p173
 
p195 이슬람 정통파는 '가잘리'를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로 인정했지만, 가잘리는 신의 존재를 몸소 느끼지 못했고, 이것이 '수피교'가 탄생 된 근본적인 불만이었다. 수피들 중에는 정신이 맑은 학자도 있었고 신에 취한 부류도 있었다. 
 
*하디스_'경험'으로 번역되지만, 무함마드가 말하거나 행한 모든 것들, 무슬림들이 '하디스'라고 부르는 인용구나 일화를 수집한 것이다. 무함마드가 죽고 7,8세대가 지난 뒤에 하디스 분류작업을 했고, 수세기동안 계속 새로운 하디스 모음집이 나왔다. 이슬람력 3세기가 끝날무렵에 그 중 6권만 정본으로 공인받았다. 

세 개의 칼리프조

아바스제국이 부패하고, 튀르크족이(야만인..)도시를 초토화 시켰다. 가잘리가 살았던 이성을 신뢰한다는 것이 아주 쉽게 비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는 세상이었고, 그 때 재앙이 시작되었다.

튀르크족의 이슬람 침입


대혼란시기

십자군 경로
몽골 침입경로

(중략)

영국과 프랑스의 신탁통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고전하면서,
아랍인에게 병력지원을 받고 땅계약을 하고(팔레스타인 땅 줄게) 유대인에게는 자금지원을 받고, 같은 땅을 이중계약합니다. 그러고선 먹튀를 하지요)

유대인과 아랍인

(위 지도에서보면, 유럽등에서 핍박받던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알박기처럼 들어와서 점점 세력을 불려나가며, 원래 팔레스타인에 살고있던 아랍인들을 몰아내죠)

p501 유럽의 맥락에서 봤을 때는 유대인이 희생자였다. 하지만 아랍의 맥락에서 보면 유대인은 토착인구를 대할 때 식민자들이었다. 1862년 독일의 시오니스트 모세스 헤스가 "유대인이 중동의 심장부에 건설한 국가는 서구 제국의 이익에 이바지 할 것이며 발달이 늦은 동양에 서구 문명을 옮기도록 도울 것이다"라고 했다. 
 
p502 나치의 공포때문에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갔다.
무슬림들에게 이스라엘의 등장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무슬림들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유럽이 우월한 힘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48.5.15 이스라엘 건국 선포 후, 아랍 연합 군대가 공격했으나 이스라엘이 이겼고,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으로 기억하지만 아랍인들이 재앙이라고 부르는 그 전쟁이 끝났을 때, 수십만 명의 아랍인은 집도 나라도 없는 신세가 되어 이웃 아랍국가에서 난민으로 살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이 되기로 했던 영토는 대부분 요르단에 합병되었다.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팔레스타인이(아랍인)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는 ’테러‘였고, 이스라엘은 테러 대응책으로 아예 장벽으로 막아버리면서 ’거대 아랍인 감옥‘을 만들어버렸죠)
 
중동은 석유덕분에 물질적 기반시설을 빠르게 수행했고, 상류지배계층은 한 때 외국인 식민주의자들이 하던 역할을 이어받았다.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해주며,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뒀다. (미국도 아랍인의 적이 됨)

1973년 석유수출국기구(OPEC)회의에서 석유를 반격무기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나라들에게 '석유통상 금지령'을 내렸다. 그 결과 산유국의 상류계층은 더 부유해졌고, 무슬림 사회의 분열 현상은 더 악화되었다. 
(*석유수출기구는 1960년에 설립한, 12개 회원국 중 9곳이 이슬람 국가였다)
 
이슬람 세계의 근대주의자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의 총리 알리부토, 이란의 샤, 아프가니스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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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파키스탄이나 요르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집트 같은 나라에  자금을 대고 무기를 주고 자유시장 경제의 축복도 내려주고 민주주의를 도입하도록 돕자고 주장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입장에서 보면, 과거부터 있었던 제 나라 안에서 무슬림들을 약화시키려는 계획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서구식 관습과 법 제도와 민주주의는 '사회를 자기 이익을 근거로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개별경제 단위로 원자화하려는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이 물질적 재화를 성취하려는 경쟁에서 남녀노소가 서로 맞붙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쪽에서는 성별에 상관없이 시민들이 더 큰 권리를 누리게 하려는 운동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쪽에서 보면 힘센 이방인이 가정의 사적인 문제에 끼어들어서 가족과 부족의 네트워크로 공동 사회의 정체성을 잘라내는 것 처럼 보이는 셈이다. 요컨대, 한쪽에서는 각 개인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 다른 쪽에서 보자면 전체 공동체의 힘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슬림무리와, 유럽인과 유럽에서 분가한 사람들의 무리의 방향값에는 단지 '오해'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양립불가능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세계가 여성의 영역과 남성의 영역으로 나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민들과, 남성과 여성이 같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시민들이 어떻게 단일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모든 사람은 민주주의를 좋아한다. 특히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하할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슬람은 민주주의의 반대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뼈대다. 이슬람은 사회적인 프로젝트여서, 정치와 경제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이자 민법과 형법의 완전한 체계이기 때문이다. 

마무리


https://youtu.be/G9jlmyRHqIM?si=3rRU1F5m711J-21o


기독교가 대부분인 유럽에서, 소수의 떠돌이 민족인 유대인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수밖이 없었지요. 관동대지진때 조선인이 마녀사냥 당한 것과 같이 말이죠.

더군다나 예수는 모두가 신의 자녀라고 했다면, 유대인들은 “우리만 선택받았어!”(선민:선택받은 민족) 라고 주장했고, 경제적으로도 잘 살았기에, 다수의 가난한 서민 속에서 ‘잘 먹고 잘사는 소수의 이방인’은 미움의 대상이었을 거예요. 물과 기름처럼 어디에도 섞일 수가 없는 유대교의 사상. 본인들이 선택받았기에 유대인만 구원받는다는 민족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이젠 서로의 아이들을 죽여가며 잔인함의 극치에 다다르고 있어, 타협이 어려운 이-팔전쟁이 되었습니다.
둘 다 땅이 필요한 것 뿐인데…서구세력의 개입없이(희망사항..ㅠ) 각자 자기들끼리 그냥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박해받은 역사교육’을 철저하게 교육한다고 하네요. 물론 잊어서는 안될 역사이긴 하지만(2천년간 이방인의 삶), 세상에 대한 적의를 품게하는 교육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세계의 거물들이 다 유대인 인 걸 보면… 앞으로의 미래가 살짝 걱정되기까지..

긴 유대인 박해의 역사 속에서(엄청난 학살이었죠..), 세상은 다 적들이라는 인식의 교육 속에서, 제가 느끼는 유대인은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같은, 적개심이 기본값인 느낌입니다. 그들에게 쌓인 한서린 세월이 너무 깊네요..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생존능력/위기대응능력을 업그레이드 하고, 전투능력를 탑재하고, 세상에 적의를 품고, 믿음따윈 모르고, 거짓말에 능숙하고, 복수심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유대인들이 지금 세상을 좌지우지 하고 있네요. 지식보단 선함이 우선시 되어져야 할텐데..

예루살렘에 멀 그리 집착을 하고…종교가 뭐라고…

선민사상은, 어떤 누군가가 유대인에게 심어준 것이겠지요. 그게 인간이던 외계인이던 과학이 발달한 어떤 문명이던 다른차원세계이던 모르겠지만,
유대인들을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말입니다. 진짜 신이라면 그랬을까요? 딱봐도 사기꾼 수법인데…
아마 유대인은 그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믿음에 이용당하는 피해자인 것 같아요. 이렇게 긴 오랜시간,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도 그 선민사상을 믿는 다는 것 자체가 해괴합니다. 인류 전체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질 않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인 종교가 있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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