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그의 서랍에 남겨진 글들 중에서 2000년 이후에 쓰신 글들을 선별해서 책으로 낸 마지막 산문집입니다.
세상에 예쁜 것
_2012 박완서
작가, 문학
나는 문학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달구었던 것은 창작욕이 아니라 증오였다. 그때의 치 떨리는 경험이 원경으로 물러나면서 증오가 연민으로, 복수심이 참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비로소 소설을 쓸 수 있었다. 내가 인간이기에 인간 같지 않은 인간과 그런 인간을 만들어낸 시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구는, 그 후에 쓴 소설을 통해서도 내가 살아온 분단시대, 산업화, 정보화 시대가 어떻게 인간성을 속물화, 황폐화시켜나가나를 증언하는 걸로 일관되게 유지 돼왔다.
제가 (토지의) 박경리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리라고 마음먹었던 것 중에 하나가 육체노동입니다. 육체노동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정신노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풍토에서 균형 잡힌 인간상은 실생활 속에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조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리 선생님은 밖에서 육체노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나는 "이것을 글을 쓰는 정신노동의 휴식으로 삼는다. 또 육체노동의 고됨을 달래주는 것이 정신노동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뜻의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진짜 건강한 인간은 몸을 움직여 결과를 보는 일을 천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노동하는 사람에게 육체노동이 중요하듯이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사람도 틈틈이 책을 읽거나 음악, 미술 등을 감상함으로써 정신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이상적인 인간상이 될 겁니다. (p61)
저는 좋은 시집을 가까이 두면서 읽는 것을 즐기는데, 박경리 선생님이 남긴 시집을 보면서도 대하소설을 쓴 분 답게 얇은 시집 안에 당신의 일생뿐 아니라 여성 삼대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런 가정에서 이렇게 크셨구나... 시라는 형식이 아니었으면 풀어놓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p64)
고등학교 때 박노갑이라는 중견작가분이 국어선생님으로 부임해 오셨는데, 선생님이 진저리 치며 싫어하시는 것이, 우리 또래들이 경험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허황하고 감상적인 미사여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경험에서 나온 것을 써라. 그리고 쓸게 생겼다고 금방 쓰지 말고 속에서 삭혀라. 포도가 포도주가 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무엇에 감동을 해서 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속에서 삭혀서 그것이 발효가 되면 쓰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온다. 폭발이 일어난다. 그것이 안 되고 잊혔다면 그 소재는 포도가 아니다."
시간은 신이었을까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神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세상에 예쁜 것
고통스럽던 병자의 얼굴에 잠시 은은한 미소가 떠오르면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니 잠든 아기의 발바닥이었다.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 발바닥의 열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 탄성이 나올 만큼, 아니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수명을 다하고 쓰러지려는 고목나무가 자신의 뿌리 근처에서 몽실몽실 돋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그 고목나무는 쓰러지면서도 얼마나 행복할까. 병자도 지금 그런 위로를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기의 생명력은 임종의 자리에도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찬탄이 절로 나왔다. (p83)
세상을 지탱하는 힘
오래전에 읽은 책 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왕들의 지혜가(남성 중심의 문화) 한계에 이르렀을 때, 세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것은 여성들의 현명함임을 알아야 한다. " 나는 그 구절을 줄 쳐놓고 읽었다. 평소에는 연약하고 의존적으로 보이다가도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괴력에 가까운 힘을 발휘해 온 우리나라 여성들을 꼭 집어 말한 것처럼 신기해서였다. 그럼 여성들은 어디서 힘을 얻을까. 아마 자연으로부터가 아닐까. 대지나 흙은 위대한 여성성이다. 사막화돼 가는 지역의 여성들은 모성조차 고갈된 것처럼 보여 더욱 희망이 없어 보였다. 모성조차 고갈시키는 땅은 악몽이었다.
명절을 나누는 지혜
명절이면 며느리들이 가장 피곤해하는 게 자기 한 몸을 시집과 친정에 어떻게 적당히 배분할 것인가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 외자녀도 점차 많아지는 추세이니 명절이 두 개씩이나 되는 걸 적절히 이용해 제발 딸들 좀 덜 피곤하게 해줬으면 싶다. 우리가 양력을 쇨 테니(신정) 사돈댁에서는 음력(구정)을 쇠시지요, 하는 식으로 말이다. 자식을 나눈 사이에 둘씩이나 되는 명절 하나씩 나누면 좀 좋으랴.
그러나 아직도 나에겐 시골뜨기티가 남아 있고 그건 내가 아직도 손수 밥을 지어먹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현역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저력이 되고 있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기는 그렇게 오래간다.
좋은 시는 당신처럼 아름다운 구도자에게나 그 진정한 속살을 드러내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게 아니로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p216)
마무리
세상에 예쁜 것…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이 그런 괴력을 발휘하며 살아왔나봅니다. 모성애를 발휘하며,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이 곧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 되었던 거죠. 남을 돕는 것이 스스로를 돕는 것이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답니다. 그러니 엄마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깨달음의 과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밀레니엄 바이블에서 아래와 같은 말이 있죠.
[어머니의 자리에 서라. 어머니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인간을 영혼으로 기르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너희 여성들이 갖고 있는 특별한 능력들은 너희를 어머니로서 긍정할 때 개발된다]
로맨틱한 그림으로 많이 알려진 천재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죽기 직전에 그렸던 그림은 [아기]입니다. 그 전까진 시대를 비판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었지요.
왜 죽음의 문턱에서 아기를 그렸을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쓰는법]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https://naturalmedicine.tistory.com/m/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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