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인생론
평소 쇼펜하우어의 명언들 중 맘에 드는 게 있어서 꼭 책을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은행가 아버지, 여류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대저택에 사는 부자였네요. 아버지 유산으로 평생 돈걱정 없이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788.2.22 독일에서 태어나 어릴 적 세계여행을 다니며 프랑스어, 영어등을 배웠고,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나는 사람보다 개를 더 좋아한다."라고 말했다죠. ^^
부유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러고보면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님도 금수저중에서도 황금수저라고 [방구석 미술관]책에 소개된 장면이 떠오르네요. 많은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철학이나 예술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에 대해선 아주 비관적이죠. 그래서 책 제목도 [사랑은 없다]인 걸까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스피노자 "남녀 간의 사랑은 외적 원인을 통해서 얻게 된 쾌락에 불과하다"
플라톤 "성적 쾌락이야말로 최대의 속임수"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수없이 닥치는 위험과 재난에서도 불구가 되지 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후손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이 곧 사랑이며, 그 사랑은 성적판타지라는 묘약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것을 대부분 어머니 덕분이다. 남녀 어느 쪽이든 중성적 기질을 띠고 있으면 둘 사이에 열렬한 사랑이 타오르지 않는다.
명예(=독)
평생을 의식주와 호화호식을 위해 악전고투하며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p68
남의로부터 찬사나 아부받기를 좋아하거나 남의 비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이 심한 사람들, 예컨대 남이 자기를 판단해 주는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국 이웃의 노예에 불과하다. 명예와 허영심의 지독한 노예, 남의 시선의 노예, 명예욕은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겸손의 미덕이라는 말은 사실 소인배들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내세운 것이지만, 고매한 인격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소인배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겸손을 내 세우다 보면 세상은 완전히 소인배들의 독무대가 될 것이다. p97
국가의 자부심, 혹은 민족적 자부심처럼 우스꽝스러운 말도 없다. 어느 나라나 국민들이 좋은 점도 있지만 사악한 인간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많은 속성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끄집어내서 찬사를 보내거나 혐오감을 보낼 필요는 없다. p100
살아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모순이다. 우리는 빈약한 성품과 편견과 선입관에서 벗어나 고뇌를 극복하고 자기를 재인식 한 다음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포기한 채 남은 생애동안 육체가 소멸되기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의지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 사는가? 그들은 강렬한 욕망의 노예적 삶을 극복하고 초월해서 마음의 평온과 고요를 얻었으며, 깊은 자기 인식과 자기 확신과 영적 행복감에 젖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버리면 얻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생존의 의지에 얽매인 채 허망한 욕망을 삶의 꿈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존 의지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들은 얼굴에도 그 마음이 드러나 있다. 그들에게는 인식만 남아있고, 의지는 소멸되어 있는 것이다.
종교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성당이나 교회와 절이나 신전 등은 건축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신에 대한 깊은 열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 열망은 물질적인 욕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단지 신에 대한 열망은 물질적 욕구보다 약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조잡하게 꾸민 천박한 신화만으로도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을 보자. 그렇게 유치하게 꾸며진 책이 하나의 종교를 탄생시키고 그 종교는 전 세계에 보급되어 1,200년 이상이나 수천만 명의 열광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고 그들의 도덕적 이념이 되어 죽음까지도 돌보지 않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중략)
괴테나 셰익스피어 같은 위대한 정신과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종교의 교리를 믿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마치 거인에게 난쟁이의 구두를 신으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인 것은 사실이다.
철학자는 종교를 필요악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철학자는 종교를 약하고 외로운 다수의 인간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정하지만, 종교가 저지르는 악에 대해서는 항상 적대적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철학자가 아니면 종교의 병폐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이라는 낱말은 교회의 권력자나 정권의 권력에 매달려 자신의 부귀영화를 꿈꾸는 저속한 학자들이 자기들의 이득과 권리를 위해 보존하고 있는 허약한 하느님이다.
개신교는 금욕주의와 독신주의를 부인했다. 이것은 본래의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벗어난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배교일 수도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정신과 가르침은 인간이 단지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거운 원죄를 피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참된 인생관은 인간이 끝없는 노동과 궁핍과 불행과 고뇌를 통해서 죽음으로 거듭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스도교나 불교나 힌두교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출발한다.
모든 종교가운데 유대교처럼 치졸한 종교는 없다. 유대교는 불멸에 대해서도 아무 의견이 없는 유일한 종교이기도 한다.
정치
당신이 만일 국가 발전에 어떤 유토피아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면 정치적인 유일한 해결책은 소수의 현명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통치자가 전제 정치를 어떻게 잘하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소수의 현명하고 청렴한 통치자를 어떻게 뽑느냐는 것은 국민의 의식 수준에 달려있다.
더럽고 추한 정치 지도자가 다스리게 되는 것은 그런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의 착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에 맞는 인물을 골라낸 것일 뿐이다.
고뇌
우리가 창조주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왜 이 세상을 고뇌에 가득 찬 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느냐고 항의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열악하고 불안전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성서의 원죄에 관한 부분은 우화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구약성서만이 유일한 형이상학적인 진리이다. 인간의 존재는 결국 사악한 욕망의 결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힌두교나 불교도 그렇고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나 피타고라스도 그런 견해가 옳다고 했으며 순수 그리스도교도 인간의 존재는 타락의 결과로 보고 있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고뇌 자체를 숙명적으로 끌어안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볼테르, "행복은 꿈에 지나지 않고 고통만이 늘 내 곁에 붙어 있다. 파리가 태어난 것은 거미에게 잡혀 먹히기 위해서인 것처럼 내가 태어난 것은 고뇌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였다."
절망과 허무
행복은 머물러 있으면 이미 행복이 아니다.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보이지 않고 혹시 보였다 해도 잠시 머무를 뿐이다.
삶은 끝내 죽음을 통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만일 인간이 죽음 없이 영원히 산다고 가정할 경우, 지금의 생태나 지능으로는 영원한 삶이 불가능하다. 아마 지금의 상태로 인간에게 영원한 삶이 보장된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이 같은 단조로운 삶에 염증을 느끼고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죽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아래 살아야만 그나마도 이 세상을 살 수가 있다. 여기에 우리는 죽음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고, 죽음은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생존의 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향락은 욕망을 달래는 데 불과한 것이어서 욕망의 소멸과 함께 향락도 사라진다.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저서 '공화국'에서 '늙으면 지금까지 우리를 끝없이 괴롭게 하던 성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가 있다'라고 쓴 것은 당연한 말이다.
구약 성서의 전도서에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의 참된 의미는 늙어서야 깨달을 수 있다. 나이 70이 되면 판단은 점차 명료해지고, 시간의 흐름은 매우 빨라져서 나중에는 권태조차 막아준다. 노인의 체력은 어떤 이득이나 욕망을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라면 구태여 강해져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노년기의 가난은 큰 불행이다. 만일 노년기에 가난이 없고, 건강도 괜찮다면 일생 중에 가장 지내기 편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학문이나 우주에 대한 관심이나 예술적 기질과 감수성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큰 행복이다. 그가 가진 취미나 소질은 노년기에 매우 쓸모가 많아진다. 하지만 고령기에 들어가면서 그런 것들도 소위 '메마른 이삭'에 불과해진다. 나이에 따라 모든 의욕이 점차 상실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생애에서 무엇을 이루려는 욕망이 강한 사람은 이루지 못한 한이 커서 인생이 짧다고 말하겠지만 어떤 성취나 성과를 획책하지 않는다면 일생은 너무 길 수도 있다는 얘기다.
처세 (행복)
내가 처세에 관해서 가장 큰 가르침으로 여기는 것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쿠스 윤리학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현명한 사람이 원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현명한 사람은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 쾌락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쾌락과 안일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단지 고통이 없는 평온함을 추구해야 한다. 인생은 괴로움을 어떻게 잘 견디는가를 수련하기 위해서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도 마땅히 괴로움을 잘 견뎌낸 사람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만일 현재 고통도 없고, 권태도 없는 상태라면 당신은 지금 행복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독일 작가 괴테는,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원하는 사람은 눈 뜬 장님과 같다"라고 말했다. 큰 불행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플라톤도 '우리들의 삶에서 열광할 만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지만, 12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안바리 조헤리의 시는 이 점을 더욱 잘 표현하고 있다.
그대는 세상을 잃는다 해도 한탄하지 말라
이 세상은 허무의 허무이므로.
그대 만일 세상을 손아귀에 넣어도 기뻐하지 말지어다
이 세상은 허무의 허무이므로.
괴로움도 기쁨도 한낱 이슬처럼 잠시뿐이니
이 세상에서 얻음과 잃음도 선악도 허무의 허무요
없음의 없음이거니.
어떤 사람이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그가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큰 불행이 닥치면 작은 근심 따위는 거들떠볼 경황도 없다. 큰 그늘은 작은 그늘을 덮어버린다.
공사판의 노동자들은 설계도를 본 적도 없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벽돌을 나르는 사람을 벽돌만 나르고 벽돌을 쌓는 사람은 쌓기만 할 뿐이다. 건물이 설계도대로 올라가는지는 오직 감독관만이 알 수 있다.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인생 전체의 설계도를 보면서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닥치는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자기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그 완성을 위해 일생을 설계도대로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
인간은 내일이라는 희망과 기대 속에 일생을 마친다. (머리 앞쪽에 풀 한 묶음을 매어둔 당나귀가 풀을 먹겠다는 희망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것처럼) 우리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희망은 이루어졌던가? 우리는 현재 아무런 괴로움이 없는 무사한 시간에 대해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삶은 과거에 대한 회환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아니다. 현재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괴로움이 없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세상을 넓게 보면 욕망이 커진다. 시야와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 욕구가 더욱 발생하고 욕구가 생기면 그것을 이루려는 걱정과 불안이 증가한다.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친구가 많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소망과 욕구의 접촉 범위가 커지면서 불행을 자초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커진다. 괴로움은 적극적인 마음에서 비롯되고 행복은 소극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는 넓은 곳을 바라보기보다 좁은 시야에 바라볼수록 또 행동범위가 넓은 것보다 좁을수록 더욱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을 잘하는 데 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명상을 즐기고 혹은 마당을 쓸고 꽃을 바라보는 일 같은, 일상의 평범한 일 그 자체를 말한다. 예술가들이 행복을 묘사할 때 늘 한적한 시골과 자연풍경과 외로움과 고요함을 찬미하고 있지 않은가. 예술가들은 단조로움과 단순함이 행복의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순하고 단조로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지적인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권태라는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웃과의 교제를 즐기고 향락과 쾌락을 좇는 사람들은 고통과 고뇌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향락과 쾌락에는 반드시 거짓과 위선이 깃들어 있어서 그것에 의해 상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교집단은 으레 우리들에게 타협과 양보를 강요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자신이 섞이거나 단체나 클럽이나 모임에 가면 개인은 무력해져야 하며 개성은 사라진다. 자신이 자기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고독할 때뿐이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도 혼자 있을 때뿐이다. 집단에는 개인의 자아가 없고, 그곳에서는 개성이 뚜렷할수록 더욱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건강이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와 정신의 안정이다. 그런 중요한 것을 다른 사람과의 일치를 통해서 얻기는 어렵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나 부모 형제라도 자기 자신과 마음의 일치를 이룰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고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보물이다. 우리는 고독해지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아주 많아야 하고 자기 자신과의 만남과 대화를 즐겨야 한다. 고독에 단련된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사실 자기 자신 속에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기대지 않는다. 자신 속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남의 것에 기웃거리고 기대는 것이다. 내면적 자아가 공허한 사람일수록 외부에서 끝없는 자극을 구한다. 그는 외부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면 스스로 파멸한다.
목적이 없는 한 사교가 뛰어난 인물은 대체로 지능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일단 평가해도 된다. 그러나 비사교적인 사람들, 특히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봐도 좋을 것이다.
프랑스의 저술가 베나 단 디 셍피엘은 '음식을 적게 먹으면 건강에 좋고, 사람을 적게 만나면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의미 깊은 말을 남겼다. 따라서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고 즐겁다면 당신의 정신의 노다지를 캔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과 만나기를 피하고 고독을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독은 뛰어난 인물들에게 찾아오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갖고 싶은 소유욕에서 벗어나려면,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이라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남의 좋은 집을 보고 '나도 저런 집에서 살았으면'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이런 집도 없다면 어디서 살았을까. 이런 집에서 사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라고 상실을 가정해 보라는 것이다. 그 순간 아까 본 멋진 집보다 내가 사는 초라한 집이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깊은 명상에 잠겨있는 사람이다. 명상에 잠긴 사람은 행복하다. 보통 사람들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보다는 무엇인가를 보고 듣거나 외부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잠시도 견디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라고 느끼려고 하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갖고 나온 고유한 성격과 개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은 이처럼 내재적인 본능의 지배를 받는 것이므로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한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든 한 번 절교한 친구와 화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친구는 훗날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본능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한 번 잘못을 저질러 해고한 하인을 불러들이는 것도 잘못이다. 사람은 일단 이해관계가 바뀌면 태도가 달라진다.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이 파악되면 그런 줄 알고 그를 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를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그와 헤어졌던 이유와 함께 받아들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들의 성격적 특성을 마치 광물의 본래 특성처럼 분류해 둘 필요가 있다.
모든 전쟁 행위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강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최근에 겪고 있는 친구의 불행과 슬픔에 관해 듣는 일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특성이자 본성의 하나이다. 반대로 친구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면 함께 기뻐하기보다 마음 한 구석에 야릇한 시기심과 부러움이 싹트는 그 심리가 바로 우정의 뒷면이다.
자기 재능을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과시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자신의 뛰어난 재능이란 과시하는 순간 공격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재능을 감추는 위장 가면을 쓰는 일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이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다는 것을 애써 보여야 한다.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 미움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남자들은 좀 바보처럼 보여야 하고 여자도 외모가 떨어져야 다른 사람들이 친밀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과 만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남의 잘못을 고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남이 차마 귀로는 들을 수 없고,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더라도 개입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가 서투른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된다.
남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해 보아라. 그러면 상대방은 더욱 신이 나서 더 큰 거짓말을 떠벌려서 결국은 스스로 가면을 벗어버리게 된다. 그 와 반대로 실수로 비밀이 드러났을 경우에는 불신의 태도를 취해 보아라. 그러면 상대방은 마침내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 말 것이다.
개인적인 비밀은 깊이 숨겨 두어야 한다. 아라비아의 격언을 보면 생활의 지혜가 담겨있다. '적에게 알려서 안 될 일은 친구에게도 알리지 말라. 비밀을 지키면 비밀의 주인이 되지만 비밀을 고백하면 비밀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평화의 열매는 침묵의 나무에서 열리는 법이다.'
불행을 당하고도 침묵하고 냉정해질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당한 일이 지금까지 당한 재앙 가운데 가장 사소한 것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이미 생존이라는 것이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 불행을 당했다고 울거나 행운에 날뛸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나쁜 인격자를 만나더라도 '그래, 세상에는 저런 추악한 존재도 필요하지'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그런 사람을 적대시하면 우리들은 불의를 저지를 수밖에 없고, 우리들의 일생은 온통 투쟁에 걸어야 한다. 어차피 그들을 내가 바꿀 수 없을 바에는 비난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행복은 아름다운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풍경과 같다. 이 풍경을 멀리서 보면 놀라울 만큼 아름답지만 가까지 다가가거나 그 안에 들어가면 조금 전 놀라운 아름다움은 어느덧 사라진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의 모습처럼 마음속에 잘 상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거울을 볼 때 똑바로 응시하기만 할 뿐, 사실은 시선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들을 대부분 놓치고 있다. 자기 모습을 냉정하게 보기 위해서는 자기 모습을 자기가 아닌 모습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마무리
저는 저녁에 자려고 이불 덮고 누워있을 때 정말 행복감을 느껴요. 전생에 쉼 없이 일만 하던 노예였을까 싶을 정도로, 편하게 누워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저는 이런 거에 행복을 느낍니다.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먹고 자는 것이 얼마나 안도감과 행복감을 주는지 몰라요.
책에서 [인생은 괴로움을 어떻게 잘 견디는가를 수련하기 위해서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도 마땅히 괴로움을 잘 견뎌낸 사람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나와있지요.
[고생+ 주관적 평가= 고통의 총량]이라고 유튜브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 고통은 나의 주관적평가가 만들언 낸 것이기도 하기에,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대응방법을 기르는 것이 행복해지는 법이기도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부모님은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고, 특히 그와 어머니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인생 자체가 고통과 고뇌. 그것이 기본값.
삶이 지옥 그 자체. 라는 쇼펜하우어…
지옥에서 이 정도의 삶은 행복 아닐까요?
좋은 명언도 많이 남겼지만, 그의 인생을 보면 패륜아, 중2병, 관종…세상을 증오하면서도 평생 부유한 현실을 살았던, 표리부동의 인물 같기도 합니다.
부모돈으로 부모의 보살핌아래 잘 먹고 잘 살면서, 베스트셀러 인기여류작가 어머니를 끝없이 비난하는 건 참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긴 삶을 증오만 하면서 산 그의 인생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말년에는 인정을 받고 행복하게 마무리 했지만요.
저는 개인적으로 스피노자와 니체가 가장 맘이 갑니다. 칸트, 헤겔 등등 보다는,,
스피노자는 인간이 타인의 자유와 신념에 간섭하는것을 극도로 혐오했다고 합니다. 유대교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그들을 거부함으로써 암살 당할 뻔도 하고, 종교재판도 겪었지요. 저도 간섭을 극도로 싫어하는 개인주의자라서 맘이 갔던 걸까요…과거 [개인주의자 선언]_문유석_책을 보며 맞아맞아 나도 그래~ 하면서 맞장구치며 봤던 기억이 나네요.
아래 니체와 스피노자에 대해 한 번 읽어보세요. ^^
명랑 철학 니체 - https://naturalmedicine.tistory.com/m/177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https://naturalmedicine.tistory.com/m/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