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문득 스피노자가 궁금하여 관련된 책을 기록합니다.
대중이 선동되고, 사회질서가 무너졌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과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과거 철학자의 생각을 듣고 싶었습니다.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_이수영 저
[스피노자의 환경]
1632년 네덜란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인. 1677년 폐병으로 사망.
당시 시대상황은 야만의 극치, 전쟁의 연쇄, 독재정치, 선동된 대중, 폭동의 현장이었고, 그 속에서 스피노자는 인간을 위한 윤리학을 탐구했다. 감정과 운명에 예속된 인간이, 자유인이 되는 이성적인 방법에 대해 스피노자는 평생을 탐구했다.
[스피노자의 저서]
1. 신학정치론: 대중들은 비합리적이며 불나방 같고, 종교는 전쟁과 편협만 낳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온갖 미신에 쉽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욕심많은 사람들이며, 자신의 두려움에 의해 광기로 변하고, 그 대중의 두려움에 기생하는 것이 종교와 미신이다. 이 책은 출판뒤에 엄청난 비난을 받음.
2. 에티카: (14년간 집필) 난해한 철학적 논증을 수학적, 기하학적으로 증명한 책으로 스피노자 사후에 출판 됨. 신학정치론 출판 후 사회에서 거의 매장되고 살해위협도 종종 느꼈던 스피노자였기에, 정치적 비판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학적으로 증명하려 한 그의 고충이 느껴집니다.
[실체, 속성, 양태]
[실체]는 의존적이지 않고 스스로 실존하는 것,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양태]는 실체가 변한것,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 인간 포함.
실체를 신or 우주,
속성은 그 통로,
양태는 물질적 존재라고 대입할 수 있겠다. 여기서 양태는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그 신 자체가 자신을 변화시켜 만들어낸 양태들이다.
- 인간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실체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실체의 속성에 대한 규정과 정의에 인간의 삶이 달려있다. 라고 생각하여 인간의 삶을 위한 그의 노력이 정말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 삼각형의 본질을 알려면, 삼각형을 그린 사람? 삼각형을 그린 도구?를 알아야 하나요? 외부원인에 대한 파악은 삼각형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삼각형 내재적 특성을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생각한 성서의 주요 목적]
성서의 목적은 "단지 복종을 가르치는것"이기에 성서는 "복종을 위한 훈련"이고, "복종을 촉진하는 수단들"이지 결코 지식 전달은 아니다. 즉 순종/처벌/보상과 같은 도덕적 영역과 관련된, 두려움을 통해 대중을 지배하는 목적이었다.
만약 사회가 죽음에 대해 더 많이 걱정을 하게 하고, 죽음이 검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신들도 어떤 걱정과 두려움에서 성서를 만든 것이겠지요?
[데카르트와 다른 점]
데카르트와 다른 점 중 한가지는, 스피노자의 증명은 인간(만물)을 불완전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스스로 실존하지는 못하지만, 신이 갖는 '능력'을 갖고 있다.(속성의 공통성)
신의 절대적인 실존능력, 그것은 곧 변용능력과 동일한 것이고, 신의 변용은 곧 만물의 생성이며, 만물의 생성은 또한 수많은 변용이 된다. → 말이 너무 어렵죠? 신이 만물을 창조한게 아니라 신이 만물로 변했다, 고로 우리도 신의 능력을 갖고 있다 라고 이해하심 편할 듯 합니다.
유한한 양태들에 능력을 나눠주지 않고서는, 신도 자신의 절대적인 변용능력을 표현하지 못한다. 신도 자신이 생산한 양태들을 자기 바깥에 독립적으로 두지 못한다.
= 신은 만물의 생사와 함께 존재한다
= 신없이 만물은 존재하지 않지만, 양태(물질)없이 신도 존재할 수 없다.
신이 만물을 생산하는 "목적은 없다"
신과 세계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자유의지(의도)가 아니라 필연성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본성, 자연안에는 우연적이 것이 없으며, 필연적 질서만 있다.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신적인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결정되어 있다.
영원히 사는 인간은 그 자체로 모순인, 불가능한 존재다.
[신체와 감정]
인간=정신+신체.
생각이란 스스로 창조되는 게 아니라, 신체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신의 대상은 신체이다.
우리 정신은 신체라는 감옥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젖먹이가 배고파(신체적 결핍) 우는 것은 신체적인 충동이다. 술주정, 화, 공포 모두 신체적 충동이다.
감정은 신체능력의 변이된 자연법칙이다. 증오는 사악한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물리치고자 하는 욕망의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를 기쁘게만 하는 것들로 우리 주변을 채울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감정속에서만 지낼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존재하는 순간 욕망의 존재라...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윤리적 처방 3가지]
1. 공동체
2. 능동 : 이성적인 노력과 능동의 삶
(수동성인 삶=무능력, 외부에 의한 지배, 무지하고 맹목적인 노예의 삶. )
대중이 수동적이 될 때, 언제든지 "초월적인 권력"이 실행되며, 대중은 권력에 따라 조직되고, 예속될 것이다.
3. 공통개념 형성 : 적합한 관념, 윤리적 실천 형성
→ 한마디로,
스피노자가 생각한 인류를 위한 처방전은,
이성적인 인간들의 공동체이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질에 맞춰 살아가길 원한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동일하게 원할 때, 그들은 서로에게 비슷한 장애물이 되고, 모두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사랑받고자 할 때,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게 된다.
문제는 기쁨을 유지하는게 우리 본성인데, 서로의 삶에 슬픔을 유발시키는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더 능력있고 더 강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개체는 자연 속에 없다. 자연에는 선악도 없고, 어떤 결핍과 부족도 없다. 선악은 기쁨, 슬픔의 감정에 불과하다.
이성적인 인간들의 공동체. 이것이 스피노자가 제시한 인간을 위한 처방이다.
[마무리]
책에서 신이 만물을 생산하는 목적은 “없다"고 했다.
그럴까..? 목적이 없을까…?
우리는 그냥 자연처럼,
존재 자체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각종 희노애락을 느끼고,
고통의 삶을 왜 살아야 하는 걸까?
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우주는 자신을 알기위해 우리를 만들어 냈다.”
라고 했습니다.
우주가 스스로 마음속에 뭐가 있는지 훤희 들여다보려고, 물질세계의 인간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이지요.
과거에는 종교를 핑계로 많은 전쟁과 죽음을 일으켰죠. 스피노자는 그가 살았던 그 처절한 삶에서도,
오히려 신과 세계와 만물을 긍정하며,
죽을 때까지 인간을 위한 윤리학을 탐구하고 제시했습니다.
수학적, 기하학적인 그의 증명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신은 ‘수학적 질서’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