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뉴턴의 무정한 세계
_2023 정인경
이 책은 한국을 중심에 놓고, 유럽역사(기존 서양 과학사)를 재해석했다. 우리 입장에서 서양의 근대 과학은(대포, 군함) 무정한 세계였다.
아래 과학의 여정을 살펴보며,
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 보자.
1840년 전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던 중국_청나라 왕조가 영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영국은 중국산 수입으로 무역적자가 심각해지자 인도에서 양귀비를 키워 아편을 청에 수출했다. 영국은 청의 아편단속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했다.(증기선, 대포)
1853년 미군의 해군 제독 페리대령이 함대를 끌고 와 일본에게 강압적으로 개항을 요구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국의 증기선은 군함으로 변신하여 중국을 짓밟았다. (중국이 서양 제국주의에 침략당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은 위기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때 일본은 미국과 유럽에 사절단을 보내어 서양 배우기에 나섰다)
1866년 병인양요(프랑스 군함의 강화도 침입_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이유로)
1871년 신미양요(미국 군함의 강화도 침입_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개항요구)
1875년 일본군이 강화도에서 무력시위를 하며, 미국에 당한 방식대로 조선에게 개국을 강요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 대패.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싸움.
1938년 중·일전쟁. 일본제국의 중국 대륙 침략.
19세기 서양 군사기술에 의해
팽팽하게 맞서던 동서양의 힘의 균형이 깨졌다.
*1868년 일본은 메이지 정부가 집권해, 서양 과학자들을 대거 초빙해 일본인들을 가르치게 하고,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해 과학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다. 그렇게 외국인 교수들이 떠난 자리에 돌아온 유학생들이 자리 잡았다.
17세기 과학혁명, 18세기 산업혁명, 19세기 제2차 산업혁명으로 성취한 과학기술문명으로 유럽은 전 세계를 지배했다. 유럽인들은 유럽식민주의가 미신과 무지에 대한 과학과 이성의 승리라고 여겼다. 식민지 정복산업, 미개한 지역을 개발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과학기술은 서양인에게 우월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대한 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한반도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인 및 경찰이 기분 내키는 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우리는 진화론도 모르면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고 뉴턴과학도 모르면서 계몽주의를 부르짖고 있었다(열등감 자극). 근대과학이 일제 식민지배와 함께 강압적으로 이식되면서, 우리는 과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근대 과학기술과 산업화를 앞세운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에 희생되었다. 서양의 과학기술은 식민지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이익을 주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미래의 과학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물리학자들의 전쟁이라고 했던 것처럼 제국주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 키더니 종국에는 최신 현대물리학을 인간 살상용 군사기술에 적극 활용했다.
근대과학의 핵심
동양에는 없고 서양에만 있는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은 유클리드 기하학(논리적 추론)과 실험이었다.
서양인은 동양인이 전혀 알 수 없는 수학이라는 언어를 만들고 실험도구를 창안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자연세계를 이해했다.
코페르니쿠스의 가설로만 있던 지동설, 브루노가 지동설이 맞다고 주장하고 산채로 화형을 당하고 죽자(1600년), 갈릴레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입을 막았다. 1609년 망원경이 발명됐고, 갈릴레오는 천체관측도 가능한 망원경을 만들었다. 지동설이 진리임을 확증하는 수많은 증거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갈릴레오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증거를 보여주었지만, 신학(성경)을 가장 우월한 것으로 여겼던 중세적 세계관에서 갈릴레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목숨부지를 위해 거짓을 맹세하고 죄인으로 가택연금으로 살다 1642년 사망했다. 같은 해 뉴턴이 태어났다.
17세기는 과학의 춘추전국 시대였다. 뉴턴은 중력의 정체와 원인에 대해 모르지만, 그 크기를 계산할 수는 있었다. 뉴턴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혁명을 운동법칙, 만유인력, 미적분학으로 완벽하게 증명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혁명에서 시작된 과학혁명은, 뉴턴에 이르러 마침내 종결되었다. (그러나 뉴턴의 만유인력도 프랑스 과학계는 1세기 동안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뉴턴의 *미적분학은 유클리드 이후에 나온 최고의 수학적 방법이었다)
*미적분학: 운동이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추이를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다.
과학주의(계몽사상)의 피해
17세기 유럽은 종교 분쟁과 권력다툼의 아수라장이었다. 종교적 미신과 독단, 전쟁과 폭력이 난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뉴턴과학은 유럽지식인들을 눈뜨게 했다. 과학적 방법이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각 분야로 확대되어 영국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1727년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뉴턴 사망)
모든 혁명의 시작은 과학혁명이었다.
과학은 자연의 수학화였다. 근대과학은 자연을 기계론적이고 수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나타나면서 뉴턴의 고전역학이 지닌 한계가 드러났다. 중력은 뉴턴이 상상했던 것처럼 물체들 사이에서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었다. 뉴턴과학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며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상대적 진리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과학이 역사적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했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사상(과학주의)은 비유럽인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보게 했다.
19세기 서양인들은 식민지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했다. 식민지를 착취하고 수탈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며 식민지를 희생시켰다. 당시 유럽은 식민지의 인력과 자원 없이는 경제적 발전도, 역사적 진보도 이룰 수 없었다. 유럽 밖은 식민지 쟁탈전으로 다망했지만, 정작 유럽 사회는 풍요롭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서양 제국주의의 과학주의(계몽사상)에 부당하게 상처 입었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식민지인의 현실이었다. *유럽인들은 유색인 원주민들을 파리 만국박람회장에 전시하며 백인종의 우월감에 빠졌다. 인종학, 인류학, 민속학, 언어학, 해부학, 인체측정학, 두개골학 등 모두 과학의 이름으로 식민지인을 실험하고 관찰했다. 식민지인에게 주어진 과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치가 아니라 단지 식민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
(*1907년 일본은 도쿄권업박람회에서 조선인 남녀 두 명을 전시했다)
인간을 가두어놓고 쇼 무대에 세우는 세계,
모두에게 유럽인이 되라고 강요하는 세계,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 진보라고 하는 세계,
출구는 순응뿐이라고 가르치는 세계,
외부에서 주어진 보편적 가치는 폭력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식민지 역사에서 똑똑히 경험했다. 과학의 보편적 가치란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과학의 출발점, 다윈의 진화론
다윈은 정통 기독교 신자였다. 하지만 남아메리카에서 화석 증거들을 관찰하고는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믿어 왔던 신과 자연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은 고정된 것인가, 변화하는 것인가? 화석의 증거들은 구약성서의 창조론을 부정했다. 승선할 때 가지고 탔던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를 탐독했던 다윈은 한차례 격변으로 산맥이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솟아오르는 것임을, 지구 환경이 점진적으로 변화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지질학적으로 긴 시간이 주어졌다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구 환경뿐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동식물도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_진화론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침팬지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데 수직적인 사다리 모형을 제시했고, 다윈은 '나무'로 표현했다. 단선적인 진화가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 종이 갈라지는 분기 진화를(종분화) 말하고 싶어서였다. 사다리처럼 방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무작위적으로 일어난다. 목적도 없었다.
인간을 각각 별개의 종으로 보는 하버드 대학 루이 아가시의 견해는 인종차별주의와 노예제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로 남용되고 있었다. 다윈은 노예제에 반대했다. (1859년 종의 기원 출판, 1882년 사망)
→ 다윈의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서양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한낱 진화한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 다윈의 진화론은 창조론을 부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불경스러운 사상이었다. 게다가 자연에 질서도 없었다. 자연선택에는 목적도, 방향도, 미래도 없었다.
전자기학
세상의 모든 물질은 전기적 성질을 지닌다.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뤄져 있고, 원자는 서로 반대되는 전기적 성질을 띤 입자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물질은 양성자(+)와 전자(-)가 균형을 이뤄 전기적으로 중성이다. 전기의 본질은 원자 속의 전자다.
1865년 맥스웰은 [전자기장에 대한 동역학적 이론]을 통해 전자기를 수학의 네 가지 방정식으로 보여줬다. (1867년 75세 나이로 사망) 맥스웰은 장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뉴턴 식의 수학을 버리고, 벡터 미분이라는 새로운 수학적 방법을 채택했다. 그는 자기장의 시간적 변화가 전기장을 만든다는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현상을 수학적으로 표현했다(전형적인 파동방정식). 전자기 효과가 전달되는 시간과 속도를 계산해 보니, 빛의 속도와 일치했다. 빛은 전자기파였다. (하지만 당시 아무도 이를 이해 못 했고 1887년이 되어서야 인정받음)
치졸한 사업가 에디슨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쟁탈전에 전신을 이용했다 (1885년 러시아, 영국, 프랑스, 터키의 연합군이 벌였던 크림전쟁) 전신은 전쟁에서 필수적인 통신수단이자 천단무기로 활용되었다.
1857년 인도에서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군은 인도 내부의 전신망을 통해 불과 1년 여 만에 반란군을 조직적으로 진압했다. 인도의 저항군 주모자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우리의 목을 조르는 것은 바로 저 저주받을 전선이로구나!"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1858년 영국은 인도를 점령하자마자 영국과 인도를 잇는 전신선 공사부터 시작했다. 전신사업은 정치적으로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네트워크였다.
전신다음으로 전등이 주목받았다. 전등에서 노다지를 캘 것이라고 야심을 품었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1847~1931) 오늘날 교육심리학에서는 그가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아동이었다고 진단한다.
에디슨은 남의 아이디어를 가져다가 상품성 있는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데 천부적 재능이 있었고, 그다지 양심에 걸려 하지도 않았다. "산업과 상업에서는 누구나 남의 것을 훔치기 마련이다. 나 자신도 많은 것을 훔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난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 방법을 알고 있다."라고 뻔뻔하게 말하곤 했다.
1879년 12월 31일 에디슨은 좀 더 업그레이드된 백열등을 출시했다. 그리고 에디슨 조명회사, 에디슨 기계제작소, 에디슨 전기튜브사, 에디슨 전등제작소, 에디슨 중앙발전소의 문을 열었고, 이러한 에디슨 제국은 다시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으로 통합되었다가, 1892년 톰슨 휴스턴사와 합병해 제너럴 일렉트릭이라는 공룡 대기업이 탄생했다.
1888년, 미국으로 이민온 세르비아의 물리학자 니콜라 테슬라가, 에디슨의 직류 발전기에 대항해 교류 발전기를 발명했다. 직류 발전기는 전류를 전달하는 과정, 즉 송전과 배전에 문제가 있었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집집마다 전달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전류의 양과 높은 전압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굵은 구리선을 써야 했는데, 그러려면 이 지구상의 구리를 다 긁어모아도 부족할 판이었다. 반면, 교류발전기는 높은 전압에도 안전할뿐더러 전류를 한꺼번에 보내지 않아도 되어 굵은 구리선도 필요 없었다. 먼 거리에 발전소를 세우고 전기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에디슨은 이미 직류 시스템에 엄청난 투자를 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교류 시스템으로 바꾼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류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려고, 대학 강당에서 고류 발전기의 고압전류로 개를 죽이는 실험을 선보였다. 잔인하고 엽기적이었다. 그리고 로비활동을 벌여 교류를 사형집행에 사용하도록 하고, 교류 발전기로 전기의자를 만들어 교도소로 보내 사형을 집행시켰다. 사형수는 처참하게 '구워져' 죽었다. 이러한 에디슨의 치졸한 공작에도 불구하고,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전기 시설 독점권을 웨스팅 하우스사가(+테슬라) 따냈다.
전기산업을 비롯해 화학산업, 철강 산업, 자동차 산업, 통신 산업 등은 산업적 연구를 통해 크게 성장했다. 과학이 산업이라는 엔진을 달자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며 새로운 과학기술의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빠른 속도로 전 세계를 서양 중심의 산업화로 지배해 나갔다.
조선에 빠르게 이식된 산업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한 1879년으로부터 5년 뒤, 1884년에 대한제국은 에디슨전등회사에 전등설비를 발주했다. 전차가 개통된 것은 1899년이었는데, 당시 조선은 외국인들도 놀랄 정도로 도입시기가 이른 편이었다. (전기산업의 본고장 미국 은 전차가 1888년에 개통) 무선 방송 라디오의 도입은 이보다 더 빨랐다.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에서 처음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것이 1920년이었는데, 우리나라는 1924년에 시험방송을 했다. 1929년에는 함경남도 부전강에 대규모 수력발전소 건설사업이(일본을 위한 발전소, 4년의 짧은 공사기간 동안 조선인의 피해가 큼) 추진되었다. 이 식민지의 기술 이전은 철저히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과 산업화는 도시라는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했다.
1901년 명동과 충무로에 600개의 민간 전등을 가설하고, 1912년에는 남대문로에 조선은행을 건립하고 금융가로 만들었다. 1927년에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을 세우고, 형형색색 네온사인이 들어섰다. (↔경성 북촌의 전통시가지는 1930년대도 가로등 하나 없었다) 1930년대에는 경성 인구 중 3분의 1이 전차를 이용했다. 전기는 필수품이 되어갔다.
일제가 틀어쥐고 있는 과학기술은 경제적으로 민족을 수탈하고, 정치적으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도구였다. 일본의 과학기술과 공업이 발전할수록, 식민지적 수탈만 가중되었다.
김용관은 일제에 의해 수동적으로 과학기술이 이식되는 것을 저항했다. 독자적인 산업화를 추구했다. 과학운동이 대중의 지지는 받았지만,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옥고를 치른 뒤 가난하게 여생을 마쳤다.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인 20세기의 과학기술은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과학기술이 식민지를 일방적으로 지배했다. 문화적으로 과학적 감성을 키울 수 없었다. 일제는 조선에서 과학기술교육을 못하게 했다. 단지 조선을 수탈할 목적으로만 교육기관을 운영했다.
일제는 과학기술 교육과 고등교육 둘 다 억제했다. 식민지가 근대화를 촉진한 것이 아니라, 한국 근대화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일본의 식민 지배였다.
식민지 최고 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전문 기술자로 일했던 작가 이상(본명 김해경).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와 도시화가 조선의 발전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뇌했다. 수학, 물리학, 건축학 등은 성공과 출세의 도구였을 뿐이지 결코 그의 삶을 일깨우는 앎으로써의 지식이 아니었다. 통치자의 언어였던 일본어처럼 근대 과학과 기술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지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상의 문학이 모국어의 따스한 속살을 갖지 못한 까닭은 일본어와 근대과학이라는 지배자의 언어로 식민지 근대를 표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1905년 아인슈타인의 4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_빛의 입자적 성질, 원자의 실제 크기 측정법, 특수상대성이론, E=mc² _ 이것으로 뉴턴 시대는 막을 내렸다. (에너지=질량 ×빛의 속도의 제곱)
(우리에겐 을사늑약이 체결된 치욕의 1905년 = 일본에겐 러일전쟁 승리의 1905년)
어떤 기자가 상대성이론을 간단하게 말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전 사람들은 세상에서 모든 사물이 사라져도 공간과 시간은 남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 역시 다른 것들과 함께 사라진다."
이론은 경험적 사실들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굳게 믿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항상 일정하다는 실험적 사실로부터 시간과 공간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그의 이론이 충격적인 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이 변형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였다.
E=mc²은 우주에서 가장 큰 힘인 핵력이 원자핵 속에 있음을 입증했다. 큰 원자핵이 쪼개지거나 작은 원자핵이 융합될 경우에 모두 질량 결손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매우 큰 에너지가 발산되었다. 이는 원자핵폭탄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 핵분열과 핵융합을 설명하는 원리이기도 했다. 또한 우주의 별들을 빛나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태양이 어떻게 에너지를 만드는지도 밝혔다.
또한, 뉴턴의 말처럼 태양과 지구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태양의 질량이 시공간을 구부러지게 만들면, 그 굴곡에 따라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중력을 설명했다. (고무판에 볼링공을(태양) 놓고 구슬을 던지면 구슬이(지구) 볼링공 주의를 돌면서 움직임) 중력은, 시공간의 굴곡이 만들어낸 기하학적 구조의 부산물이었다.
사과가 낙하하는 가속도=중력(일반상대성이론).
낙하=휘어진 시공간을 따라 움직이는 것.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1922년이 되도록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상 지명위원들이 상대성이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미루다가 결국 '광양자설'로 노벨상을 수여했다.
양자역학
1927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발표되자 아인슈타인은 심기가 불편했다. 측정하기 전에 전자의 위치는 확률로만 말할 수 있다. 그러다 전자를 측정하면, 측정행위가 전자를 교란시켜 확률 파동이 붕괴되고 전자의 위치는 명확한 값을 드러낸다. "달을 바라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달이 그곳에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달의 위치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달을 바라보는 것이다"
중성자의 발견
1932년 원자핵 속의 중성자가 발견되었다. 원자에는 양성자와 전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원자핵에 전기적으로 중성을 띤 중성자가 양성자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둘을 결합시키는 힘=핵력) 핵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지구의 모든 물질을 이루는 원소는 수소에서 우라늄까지 100여 종이 있을 뿐이다. 이 원소들의 고유한 특성은, 원자의 질량인 원자량, 즉 원자핵의 양성자 개수로 나타났다. 원자핵의 안정성 때문에 원소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런데 원자핵이 스스로 붕괴되는 방사성 원소가 발견되었다. 라듐 같은 원소는 방사선을 방출하고 다른 원소로 변했다. 물리학자들은 원소의 변환이 원자핵의 붕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원자핵을 어떻게 인공적으로 붕괴시킬까 하다가 '중성자'가 발견된 것이다. 중성자의 발견 이후 실험물리학자들은 원자핵 포격실험을 할 수 있는 입자가속기를 만들었다.
1945년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될 때,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일본에서 원자핵과 관련된 연구를 전면 금지시키고, 10년을 공들인 *사이클로트론을 철거해 도쿄 앞바다에 던져 버렸다. (*사이클로트론 : 입자가속기의 한 종류)
저자의 글
우리의 과학교육은 과학적 감성과 인문학적 통찰을 키워 주지 못했다. 나는 대중 과학서를 쓰는 연구자로서 이러한 현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총균쇠], [문명의 붕괴]가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문제와 해결책을 읽다 보면, *제1 세계와 * 제3세계 사이의 불평등 구조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느끼게 된다. (*제1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 제2세계는 사회주의 진영, 제3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표명한 개발도상국을 통틀어 부르는 세력)
우리는 왜 세계의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가! 우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희생되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과학을 왜 공부하고, 과학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를 나에게 묻는다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라고 말하려 한다.
마무리
내 아이가 청소년기에 꼭 읽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내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쓰신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서양 과학자들이 발견한 세상을 우리의 눈으로 다시 보며, 느껴 볼 필요가 있지요.
학창 시절, 과학은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또는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는 것' 쯤으로 여기며 생각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학교에서 시험만 치르며 살았어요. 체념과 순응으로.
요즘 아이들도 어릴 적 저처럼 꿈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TV, 유튜브 속의 연예인과 유튜버만 보고 사니, 모두들 꿈이 비슷합니다.
꿈이 없는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도록, 학교는 다양한 직업군의 인재들을 초빙하여 보여주면 참 좋을 것 같네요. 이렇게 다양하게 경험을 해야 꿈이 생기겠지요. 개인이 성장해야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지구도 나아지지 않겠어요?
지금 세상의 과학기술은 경쟁하듯 발전하고 있고, 미래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고 있습니다. 하나의 독점기업, 초우량 기업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듯합니다. 기술은 자연의 불합리함을(지리적 차이에서 우연히 발생한 불평등/ 총균쇠) 보완해 줄 수도 있지만, 파괴할 수도 있지요. 불평등과 전쟁을 야기했던 역사의 과학에서, 아름다운 공존이 되는 과학으로 발전하길 바랍니다.
목표, _ 우리 개개인의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무언가를 할 때 선한 목표를 중심에 둔다면, 선택의 기로에서도 어려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과학기술 너머 인간존중으로.
아래는 김우재의 [플라이룸]에 실린, 뉴턴에 관한 내용이다.
[뉴턴이 말해서 유명해진 격언이 있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뉴턴이 처음 만든 말도 아니고, 뉴턴이 자신의 겸손을 나타내기 위해 한 말도 아니다. 사실 뉴턴은 이 말을 통해 자신의 경쟁자인 로버트 훅을 은근히 비꼰 것이다. 귀족 출신이자, 권위 있는 과학자들의 지원을 받았던 자신을 음해했던 평민 출신 로버트 훅은 거인들과 만나지도 못했을 테고, 그러니 자신처럼 멀리 보지 못한다는 냉소가 담긴 말인 셈이다.
뉴턴의 사후 자료들을 살펴보면 연금술, 마술같은 자료만 가득했다…]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아래글을 참고하세요.
부모의 남다른 질문력, 독서와 대화 - https://naturalmedicine.tistory.com/m/283